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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불국사, 현세와 내세로 가는 부처님 나라의 형상

by Sage 역사인문여행전문가 2023.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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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국사는 누가 언제 지었나?

경주시 토함산 서쪽 기슭에는 유서깊은 사찰 불국사가 자리하고 있다. 불국사 창건은 2가지 다른 주장이 존재한다. 먼저, 서기 528년(법흥왕 15년)에 법흥왕의 모친 영제부인의 발원으로 창건되었으며 574년에 진흥왕의 모친 지소부인이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을 주조하여 봉안하였고 통일신라시대인 서기 751년(경덕왕 10년)에 당시 재상인 김대성이 크게 중수하여 탑과 돌다리 등을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두번째, 우리나라의 정사 역사책인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한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김대성은 원래 모량리의 가난한 집에 태어났으나, 인연에 따라 경주시내 부자이면서 권세가인 김문양의 집에 다시 태어났고, 이 사실이 김대성이 부자집에 다시 태어난 날 하늘에서 들렸고 왼손에 전에 쓰던 이름 대성이 써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사실을 알게되어 결국 김대성은 두 부모를 모시고 살게 되었다. 두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 전생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건설하고, 현생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중건하였다는 이야기이다. 한국인들이 대부분 불국사는 김대성이 창건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 설화이다. 영제부인 발원 불국사 창건설과 김대성 창건설이 이처럼 서로 일치하지 않으니 어느 것이 맞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첫번째 주장(영제부인 발원)에 매우 구체적으로 인물명과 연도가 제시되어 있어서 이 주장을 더 신뢰하게 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설화는 비 과학적이라서 믿기가 어렵다.

2. 대웅전과 극락전 가는 길은 다르다

맨 위 사진에 보이는 다리는 대웅전 동쪽에 있는 것이 청운교-백운교 (국보 제23호) 이고, 서쪽에 있는 것이 연화교-칠보교(국보 제 22호)이다. 청운교-백운교는 자하문을 거쳐 대웅전과 연결된다. 청운교는 푸른 청년, 백운교는 흰머리 노인, 다리 아래 인간 세계에서 다리를 건너 부처님 세계로 올라가는 것을 상징한다. 연화교와 칠보교를 지나면 안양문을 거쳐 극락전으로 향한다. 이 길은 보통 사람들이 가는 길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다. 그래서 이 다리를 건너면 극락전에 통하는 것이다. 연화교에는 그 이름에 나타난 것처럼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나 지금은 희미하게 남아있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다보탑(국보 제20호)과 석가탑(국보 제21호)이 서 있다. 동쪽에 있는 것이 다보탑, 서쪽에 있는 것이 석가탑이다. 이 두개의 탑은 불국사 중건된 751년(경덕왕 10년)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다보탑은 과거 세계의 부처님, 석가탑은 현재 세계의 부처님인 석가모니불을 상징한다. 두 탑을 한 장소에 건립한 이유는 현재의 부처님인 석가모니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이 옳다고 증명한다는 법화경(불교경전의 하나)의 내용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위 사진은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열십자 모양의 평면기단 위에 네 방향으로 돌계단을 만들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 네모난 난간을 둘렀다. 마치 나무를 가지고 탑을 만든 것 같이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나 그렇다고 결코 산만하지는 않다. 1925년경에 일제는 다보탑을 완전 해체보수를 하였는데 일체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이 때, 내부에 있었을 사리 등 유물이 사라지고, 기단부에 있는 사자상이 본래 4개였겠으나 3개를 무단반출한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은 1개만 남아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 있는데, 사자 한마리가 무척 외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가탑은 불국사 3층 석탑이라고도 한다. 이 탑은 무영탑(그림자가 비치기 않는 탑)으로도 불리는데 이 탑을 지은 백제도공 아사달과 그의 아내 아사녀의 슬픈 전설이 전해진다. 그외, 불국사내에 있는 국보로극락전에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7호)이 있고, 비로전에는 금동비로불좌상(국보 제26호)이 있다.

3. 서라벌은 부처님 나라가 되었다

서라벌은 신라시대 때의 현재의 경주를 부르던 도시이름이다. 신라가 삼국시대(백제, 고구려, 신라)를 종식하고 통일을 달성하는 데는 불교가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와 고구려가 왕실을 중심으로한 호국불교로 도입되어 민간으로 널리 퍼져 나갔기 때문에 큰 분란없이 공인된 반면에, 신라는 백성들이 먼저 불교를 받아들이고 왕실과의 갈등 후에 공인(서기 527년 법흥왕 14년)되는 과정을 거쳤다. 공인 후에는 국가종교로서 백성들을 교화시키고 단합시키기 위해 '신라는 부처님의 나라'라는 의미의 불국토를 서라벌에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고 생각된다. 현재 경주 남산, 토함산 등의 바위, 각종 유적 등은 불교와 연관되지 않는 것이 매우 드물고,  높은 산 봉우리 이름도 비로봉, 문수봉 등 불교식 명칭으로 개명된 것이 불국토사상의 반영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불국사도 불국토 건설의 일환으로 생긴 사찰이다. 그래서 이름마저 불국사인 것이다. 불국사 창건이 서기 528년,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바로 다음 해에 창건 된 것이니 불국토 사상은 불교공인 초창기부터 생긴 사상인 것같다. 이차돈 설화는 믿기 어렵지만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차돈은 부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법흥왕에게 스스로 죽음을 청하며, 죽은 후 부처님이 계시다면 기이한 일이 생길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한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머리가 멀리 금강산 꼭대기에 떨어졌고, 목에서 흰피가 났으며, 컴컴해진 하늘에서 아름다운 꽃이 떨어지고 땅이 진동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로써 부처님이 계시다는 것이 분명하게 증명되어 신라인들이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다는 설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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