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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서평 독서

[혼불] 작가, 최명희 편지

by Sage 역사인문여행전문가 2024.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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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에 가면 [혼불문학관]이 있다. <혼불>은 故 崔明姬씨가 1980년 4월부터 1996년 12월까지 장장 17년동안 쓴 대하소설이다. 전라도 지방의 언어, 문화 등이 세밀하고 아름다운 우리 언어로 채색된 문학의 정수라고 할 수있다. 문학관에 전시된 편지[수신: 김병종 교수, 서울대 미대학장 등 역임, 이 편지를 기부한 분, 전북 남원출신]를 읽자니 그들의 교류가 무척 아름답고 부럽기까지 하다.

안녕하시온지요?

 

사과 냄새가 시고 향기롭게 그러나 서글프게 섞여 있는 시월의 햇살을 받고 앉아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으니 새삼스럽게 여러가지가 고맙기만 합니다.

 

나는 아직 뜻대로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 학교에는 나가지 못하고 집에서 책도 보고 바깥도 내다보고 하면서 지내고 있지요. 요즘은 전보다 한결 좋아져서 이만하면 <일>을 시작할 수 있겠구나 싶기도 합니다. 때때로 가만히 앉아 있으면 혈관 속에서 물소리가 들립니다.

 

아주 오래 오랫만에 平和를 느낍니다. 돌이켜보면 나는 무슨 바람 속에서 그 긴 세월을 미친듯이 살아왔는가 싶습니다. 사로 잡히고 醉하고 울고 잠 못 이루고 나프탈린 닳아지듯 風化하는 젊음과 목숨이 겨워서 그대로 속이 빈 채 고꾸라질 것만 같아 부질없는 것들을 막대기 삼아 지탱하려 하였지요. 오히려 그런 것들이 나를 짓누르고 속박하고 결국은 나를 죽어가게 하였던 것을……….

 

生에 對한 근본적인 따뜻함, 이 것만이 우리 모든 存在들에게 위안이 아닌가 합니다. 前에 존경하는 先生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다이아몬드는 그 빛이 너무나 영특하여 가해성이 있다. 보는 이를 찌른다. 나는 가끔 그 말씀이 생각납니다. 눈 부시게 찬란한 햇빛을 보면 눈이 시어서 오히려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빛을 가려버릴 때 찬란하게 피어난 장미를 바라볼 때, 그리고 너무나도 아름다워 차마 마주볼 수 없는 지극한 사람 앞에 섰을 때 그분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아아, 아름다움도 지나치면 罪가 되는구나. 담담히 君子의 德을 기르고 진심으로 따뜻한 情을 길러 살아있는 날까지는 온갖 산 것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 그리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나는 아직도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말의 意味를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독선이 아닐는지요.

 

편지를 쓰다가 내다본 아파트의 언덕 배기, 거기 가을 잠자리들이 지천으로 날고 있습니다. 투명한 날개를 반짝이며 시드는 가을 풀과 잔나무까지 사이를, 가볍게 가비얍게 나르는 저 작은 魂, 그리고 시고 맑아 눈물 도는 햇빛, 하늘 저편으로 한 마리 새처럼 사라져 가는 하얀 비행기의 모습, 그 은은한 餘音, 자잘한 풀꽃 사이로 살금살금 발소리 줄이며 그 잠자리 잡으러 손을 집게같이 만들어, 다가서는 아이들이 모두 서로서로 어울리지 않으면, 사람 혼자서야 그것이 무엇이리오. 그저 存在, 有形 無形間에 生命 있고 없고 간에, 만난 것들은 모두 존귀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마음속에 알 수 없는 찬미가 고여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고요한 감사를, 이윽고 홀연히 떠나갈 이승, 무엇에도 마음을 묶어두지 말고 얽히지 말고, 아끼면서 나누면서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맨 처음 나에게 축하의 葉書를 보내주었을 때, 나는 진심으로 고마운 위안을 받았었습니다. 부끄럽고 낯설고 두려워서 웅크리고 있던 나에게 그 작은 엽서 한 장은 참으로 놀라운 힘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연극의 초대받았을 때, 그 때야 말로 나는 깊은 충격과 감동에 출렁였으며, 그 감동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뜻밖의 사고로 다쳤을 때 보내준 편지와 冊, 그리고 문병, 그때 나는 몹시 많이 다쳐서 미웠을 텐데 그런 것도 잊어버리고 다만 반갑고 좋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던 記憶. 내 어찌 모든 감사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오래 내 마음에 남을 것입니다. 더욱이 이번에 보내준 신문과 안부 편지는 좀 더 새삼스럽게 고마운 것 같습니다.

 

南道여행, 그림, 이런 말들이 주는 多感한 鄕愁, 그리고 무엇보다도 詩의 소식, 이런 것들은 모두 명랑한 뉴스입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무슨 사정인지 알 수 없으나, 실리지 않은 詩를 읽을 수 있었더라면 하는 점이었습니다. 언제 틈이 나거든 보내주시면 내가 아끼는 좋은 茶 마시며 읽겠지만...........

卒業작품 때문에 많이 분주하시지요? 나도 격려해 주시는 그 마음에 힘을 입어 좋은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교통사고를 핑계삼아 엄살도 부리고 미루어도 왔지만, 이제 이만큼 나았으니 일을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언제 어디에 있든지, 서로, 서로의 精進을 眞心으로 빌기로 합시다.

 

고마운 사람. 안녕히 계십시오

 

1980년10월14일 최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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