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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창덕궁, 근대화 상흔이 새겨진 궁궐 둘러보기

by Sage 역사인문여행전문가 2023.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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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덕궁을 가장 오래 궁궐로 사용

창덕궁은 조선의 법궁인 경북궁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궐이라고 불리었다. 태종 5년(1405년)에 경복궁에 이어 건축축된 궁궐이다.  경복궁이 공식적인 첫번째 궁전(법궁)이나은 왕자의 난으로 이복동생을 죽인 곳이며 또한 건설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정도전의 흔적이 서린 경복궁을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왕자의 난 등 군사변란으로 경복궁의 권위가 흔들들리고 있었다. 그래서 태종은 경복궁보다는 창덕궁을 더 좋아하고 주로 집무를 이곳에서 보았다. 창덕궁은 당초 작은 규모로 건설되었고 대부분 주거 및 편전 등 실용적으로 되어 있어서 정전인 인정전도 3칸짜리 건물이었다. 인정전은 1418년 세종에게 양위하기로 결심한 직후에 세종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증축을 명하여 5칸 짜리 건물이 되었다. 세종 집권 후반기에는 주로 경복궁에 머물러서 창덕궁의 비중이 줄어 든 것 같았으나 문종이후 조선전기 동안 여러 왕들이 많이 애용하였다. 창덕궁도 인조반정때 인정전만 남기고 대부분 소실되었으나 1647년(인조 25년)에 중건을 완성하였다. 임진왜란으로 불탄이후 흥선대원군이 중건(1868년 고종 5년 완성)하기 전까지 경복궁은 폐허로 남아있었기 대문에 창덕궁이 조선후기 내내 정궁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대부분의 정치적 사건 무대였다. 한마디로 창덕궁이 조선왕조에서 가장 오랜 기간 국왕의 거처로 쓰인 궁궐인 것이다. 이처럼 조선 국왕들이 창덕궁을 주로 애용한 것은 경복궁보다 구조, 입지, 심미안적으로 거주지로서 더 편안해서인듯 하다. 두 궁을 다 가보면 건축을 모르는 사람이 느끼기에도 녹음이 있는 창덕궁이 거주에 더 좋아 보인다. 조선시대의 경복궁은 내부에 지금처럼 녹지와 나무가 많지 않았고, 거의 흰색 모래나 돌판이 깔려 있었으며 건물만 빼곡해서 매우 삭막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일본제국 강점기에는 의도적 훼손도 이뤄졌으나 1900년도에 제작된 동궐도 그림이 남아 있어서 그에 따라 복원이 진행 중이다. 1997년에는 조형미와 주변환경과의 조화가 높게 평가되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 근대화 상흔이 많은 궁궐

일제는 1907년에 창경궁을 동식물원으로 만드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한참때인 1932년에는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앞으로 도로를 만들었다. 이 도로가 현재 율곡로이다. 임진왜란을 대비하여 10만 병력을 양성하자고 주장하였던 율곡 이이 선생을 욕먹이기 위해 도로명을 율곡로로 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도로가 생김으로써 창덕궁과 종묘가 분리되어 졌다. 조선시대에는 창경궁, 창덕궁과 종묘는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숲으로 연결되어 있어 생활공간과 조상을 모시는 공간이 지맥으로 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인 태종이 거처하기 위해 지운 창경궁은 창덕궁과 함께 동궐이라 불렸고 왕실 가족의 주 생활공간이었다. 종묘는 역대 조선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한 조선시대에 종묘는 사직단과 함께 국가의 근본 뼈대로 인식되었다. 또한, 우리나라 풍수지리의 음택사상에서도 큰 산의 기를 받은 음택명당이 후손들에게 복을 준다고 믿었다. 북한산 응봉으로부터 내려온 지맥이 창덕궁, 창경궁에 뻗어내려와 종묘와 연결되는 것인데 그들사이에 큰 도로를 만들어서 그 지맥이 끊은 것이다. 이 과정에서 왕이 창덕궁, 창경궁에서 출발하여 종묘를 참배할 때 출입하던 종묘 북문(북신문)도 사라졌다. 그러나 서울시는 2022년 7월 '창덕궁 종묘연결 역사 복원사업'으로 율곡로를 지하화하고 상부에 녹지를 조성함으로써 녹지축을 연결하여 지맥을 복원하였다. 지맥이라는 것이 과학적이라고 말하기 어렵지만 풍수지리사상은 우리나라 전통문화라는 측면에서 굳이 배척할 필요는 없다. 조선말기에 서양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부터 창덕궁에도 서양식 전등, 차고, 자동차 길, 현관 등이 설치되었다. 창덕궁에서 근대화의 흔적을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참고로 동, 식물원으로 운영되던 창경궁은 1983년 12월까지 운영되다가 일제잔재들을 모두 없애고 역사사료 기록에 따라 궁궐의 전각과 편전들을 복원하여 1986년에 일반에 공개되었다.

3. 창덕궁을 천천히 둘러보자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에 입장하여 금천교를 지날 때 교각중 하나에 아래와 같이 재미있는 해태상이 하나 있다. 이 해태상 몸짓과 표정을 보노라면 저절로 웃음이 난다. 조선 장인들의 해학정신이 묻어나는 것 같아 특별히 정감이 간다.

창덕궁은 크게 치조지역, 침전지역, 낙선재 지역, 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치조지역은 정사가 이루어 진 곳으로 공식행사가 진행되던 즉 정전인 인정전과 국왕이 주로 집무를 보던 즉 편전인 선정전을 중심으로 되어 있다. 침전지역은 희정당, 대조전 등 왕실 생활영역이다. 동쪽에 낙성대 영역, 북쪽 언덕너머에 후원이 있다. 전체적으로 궁궐앞쪽은 공적인 공간으로 인정전, 선정전, 국왕보좌 관청(궐내각사) 등이 배치되어 있고 뒷쪽은 국왕과 왕실의 사적인 공간으로 되어 있다. 전조후침의 원칙이 적용된 것이다. 선정전, 희정당, 낙선재 등 국왕 및 왕실가족 거처는 외부에서 침입하기 어렵도록 여러 겹의 건물과 마당으로 사방을 에워싼 소위 '구중궁궐'(九重宮闕)의 모습을 하고 있다. 유교 이념에 따라 호사스럽기보다는 검소하고 질박한 궁궐 건축이 돋보인다. 백제시대 이래로 왕실의 미학인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검소하나 누추하지 아니하고 화려하나 사치롭지 아니하다" 원칙에 충실한 궁궐이다. 창덕궁 후원 관람은 창덕궁관리소에서 사전에 예약해야 가능하다.(인터넷 예매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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