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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건청궁, 명성황후가 시해된 근대역사 현장

by Sage 역사인문여행전문가 2023.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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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건청궁은 근대역사의 중심무대이다

경복궁 내부를 남북의 주축을 중심으로 이동하는 경우에 광화문-홍예문-근정전-사정전-강령전-교태전-자경전-향원정-건청궁 순서로 관광하게 되는데 맨 북쪽 끝의 한적한 곳에 건청궁이 위치하여 있음을 알 수있다. 이처럼 건청궁은 구중 궁궐 가장 깊숙히 자리잡고 있다. 건청궁은 1873년에 고종이 자신의 사비인 내탕금을 가지고 건축하였다. 이 해에 고종이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섭정에서 벋어나 직접통치를 하겠다는, 즉, 친정을 시작한 때이기도 하기 때문에 건청궁 건립을 자신의 정치적 독립선언 표현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 건청궁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1895년)이 일어나기 전까지 황제 부부가 거처하였다. 건청궁을 보면 보통 궁궐이나 사찰에서 볼 수있는 단청이 없다. 이러한 집을 백골집이라 하는데 이는 단청을 하지 않은 궁궐이나 아무칠도 하지 않은 집을 속되게 부르는 말이지, 흰색칠을 한 집이라는 뜻이 아니라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곳 건청궁과 창덕궁 낙선재가 대표적인 백골집인데 자연스러운 목재결이 드러내는 순수미와 소박함이 느껴져서 정겹다. 민간 양반집을 본따 지은 건물이라서 단청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건물을 민간 양반집 형태와 비교해 보면, 황제의 침전인 장안당, 황후의 침전인 곤녕합, 서재로 쓰인 관문각이 민간 사대부집의 사랑채, 안채, 서재처럼 구성되었다. 한가롭고 편안하게 지내고자 건청궁을 건립하였겠지만, 이곳은 조선말기의 정치적 격변과 혼란의 무대가 되고 만다. 고종이 각 나라의 공사들을 접견하며 여러 정치적인 문제를 처리하였고, 특히 1895년에는 곤녕합 누마루인 옥호루에 명성왕후가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된 비극적 사건의 현장인 것이다. 을미사변이후 이 건물이 철거되었으나 2006년에 옛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2.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한 현장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은 쇄국정책을 버리고 미국, 러시아, 영국 등 선진외국에 문호를 개방하여 근대적의미의 국가간 통상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그야말로 물밀듯이 선진외국의 사상, 문물과 제도가 들어왔지만, 근대화를 위한 자체 역량이 축적되지 않은 조선으로서는 선진외국의 침략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1890년대는 한국역사에서 약소국의 설움을 당한 치욕의 역사사건이 여럿발생하였다. 그중에 하나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다. 이 사건의 성격을 이해하려면 당시의 국내외 상황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갑오농민전쟁에서 시작하자. 1894년에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한 농민군은 보국안민의 기치아래 봉기하게 되는데 이를 갑오농민전쟁이라 한다. 이 전쟁에 일본과 청나라가 개입하게 되고 양측의 충돌로 청일전쟁이 일어난다. 일본이 승리하여 시모노세끼조약으로 요동반도, 대만등을 중국 청나라는 일본에 넘겨주게(할양) 되고 청나라는 조선이 완전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하게 된다. 조선은 대원군이 재 등장하여 일본세력을 등에 업고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명성황후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그 힘을 빌어 일본세력을 축출하고자 하였다 이에 앙심을 품은 일본은 황후의 암살을 명령하여 시해한 것이 을미사변이다.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한 일본인들은 궁녀복장으로 숨어있던 명성황후를 찾아내서 시해한다. 시신에 석유를 뿌려 소각한 후 잔해를 향원지에 뿌려서 만행을 은폐하려 하였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증언해 줄 수 있는 목격자가 있었다. 러시아인 건축기사 이파나시 세레틴 사바타누 미국인 시위대 지휘관 윌리암 다이 대령이 이 사건을 목격한 것인데, 이들은 각각 본국에 보고함으로써 일본은 이 사건을 감출 수없게 된 것이다.

3. 향원정은 말없이 증언한다

역사의 비극을 목격했을 향원정은 건청궁앞 연못인 향원지 한 가운데에 위치한 섬에 있는 정자이다. 육각형 평면을 가진 2층 목조 건물인데, 1층은 온돌바닥이고 2층은 우물 마루로 되어 있으며 높이는 10.5m이다. 건청궁에서 향원정으로 건너갈 수 있는 다리(명칭: 취향교)가 놓여 있다. 향원정은 국왕과 가족들의 휴식공간이다. 궁궐내에 있어도 개인적 공간이기 때문에 정자로 이름붙인 것이다. 참고로, 누각은 규모가 크고 정치 연회 등 공적인 목적이 강하나, 정자는 사적인 목적으로 경치 좋은 곳에 지어진 작은 집인 것이다. 육각형 초석, 육각형 평면, 육모지붕 등 육각형의 공간을 구성하여 섬세하고 미려하며 각 구성요소간 비례감이 뛰어나 역사적, 예술적, 건축학적으로 가치가 인정되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6개의 각 모서리에 있는 주련에는 이 곳을 신선들이 노니는 곳으로 비유한 내용이 적혀져 있다. 1개는 유실되고 5개가 남아 있다. 玉池龍躍舞(옥지용약무, 신선이 사는 연못에 용이 뛰쳐 오르며 춤추네, 千山華月逈(천산화월형, 천 개의 산에는 빛나는 달이 멀리까지 비추고), 萬里衆星明(만리중성명, 만리에는 별무리가 밝게 빛나네), 崑閬雲霞積(곤랑운하적, 곤륜산 봉우리에는 구름과 노을이 쌓였고), 蓬壺日月長(봉호일월장, 신선 사는 봉래산에는 세월도 길도다). 신선처럼 고고하게 평화롭게 오랫동안 살고자하는 염원을 새겼으나 향원정은 어쩔 수 없이 아픈 역사를 목격하고, 이곳을 찾은 많은 이들에게 말없이 역사를 증언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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