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울

판전 서예, 추사 김정희 선생 최후의 걸작이다

by Sage 역사인문여행전문가 2023. 10. 14.
반응형

1. 봉은사 판전 편액 서예작품 감상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가면 코엑스 맞은편에 봉은사가 있다. 봉은사는 서기 794년(신라 원성왕)에 '견성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된 사찰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성종의 무덤인 선능을 관리하는 능침사찰이 되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와서 토지를 많이 하사받았기 때문에 은혜를 받든다는 의미의 '봉은사'로 절 이름을 고친 것이다. 조선 명종시절 문정왕후때는 승려들의 과거시험격인 승과시험을 치른 장소이기도 했다. 이러한 까닭에 현재 강남 한 복판 요지에 넓은 땅을 차지하고서 봉은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요란한 강남에 있지만 사찰 경내에 들어가면 엄숙하고 고요하다. 이처럼 도심 한 복판에 등산없이 접근가능하면서도 숲으로 어우러진 큰 사찰은 봉은사가 유일하다. 봉은사 대웅전과 판전에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 편액이 걸려 있다. 서기 1856년(철종 7년)에 영기스님이 '화엄경수소연의본'의 목판을 제작했고, 그 목판을 보관하기 위한 건물이 판전인 것이다. 판전이라고 한문으로 쓴 글씨를 감상하노라면 마치 어린아이가 쓴 것 같이 순수하면서도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것같은 편안함이 느껴진다. 문화재 청장을 역임한 유홍준이라는 유명한 학자가 이글씨를 평하기를 '대교약졸의 진수'라고 하였다. 대교약졸이라는 말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큰 재주를 가진 사람은 그 재주를 자랑하지 아니하므로 보기에는 서투른 것 같다'은 의미이다. 첫눈에 이 작품을 보면 조잡하고 서투른 글씨로 보이나, 오래 감상할 수록 그 작품성과 예술성이 깊이 들어나는 것이다. 봉은사 판전에 가면 오래 며물면서 감상하기를 권한다. 추사선생은 평생 벼루 10개를 밑창냈고 붓 일천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고 할만큰 피나는 노력을 한 분이다. 추사는 이 현판을 쓰고 3일 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2. 추사 김정희 선생의 행장

추사 김정희는 조선 후기에 금석학자, 실학자, 서예가이며 정치가이다. 1786년(정조 10년)에 태어났고 1856년(철종 7년)에 사망하였다. 추사의 고조부는 영의정, 증조부는 영조의 딸인 화순옹주와 결혼한 부마(사위), 아버지는 이조판서, 추사 본인은 성균관 대사성을 거처 병조 및 이조참판을 지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권력가이면서 유서깊은 노론집안에서 태어났다.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가면 추사고택이 있는데, 이 집은 영조의 명령으로 충청도 53개 군현이 한칸씩 분담해서 건축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추사 가문은 노론계열이기는 하지만 가풍이 붕당에 엄격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추사는 16살때 청나라 연경을 출입하며 학문의 세계를 넓히던 연암 박제가의 제자가 되어 북학파 실학자가 되었다. 그 영향으로 청나라 고증학에도 흥미를 가지게 되고 금석학자가 되었다. 북한산에 있던 신라 진흥왕순수비도 추사선생이 고증해낸 역사적 성과이다. 1809년(순조 9년)에 부친 김노경을 따라 청나라 연경에 가서 학자 옹방강, 완원 등을 만나 학문에 큰 도움을 받게 되는데 옹방강은 [사고전서]를 편찬하는데 관여하였고 경학에 정통하고 문장,금석,서화,시에 능한 원로학자였다. 추사가 옹방강과 평생 교류하며 스승으로 모실 수 있었던 것은 추사 본인뿐아니라 우리나라 학문, 예술발전에 큰 행운이었다 할 것이다. 청나라의 당시 학풍은 송나라나 명나라의 성리학, 양명학을 관념적이라고 비판하며 배척하였는데, 이 영향을 받은 연암 박지원 중심의 북학사상, 청나라 고증학을 배운 추사김정희는 조선의 보수 노론출신이지만 성리학만이 진리라는 생각을 일찌감치 버리게 되었다.

3. 추워진 연후에 사람의 진면목을 안다

1840년(헌종 6년) 안동김씨 세도정치 기간에 정치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로 유배를 가게되어, 그가 63세인 1848년에야 비로소 풀려나게 된다. 이 기간동안 한국의 서법, 중국과 한국의 비문 등을 연구하여 만든 서체가 추사체이다. 유배생활의 어려움 속에서도 계속 저술과 작품활동을 했던 것이다.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에 가면 추사가 유배시절 살았던 집과 기념관이 잘 조성되어 있다. 봄에는 제주도 고유양식의 초가집 주변으로는 추사가 사랑했던 수선화가 곱게 피어난다. 추사기념관에는 선생의 작품이 자세한 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어서 서예에 관심이 있는 분들의 필수 방문코스라고 생각된다. 기념관의 겉모습은 추사 선생의 작품 세한도 속의 집과 비슷하다. 세한도는 추사선생의 대표적 작품인데 초라한 집 한채와 고목 몇 그루가 추위에 떨고 있는 모습이 전부이고 그림 옆에 그림을 그린 경위를 한문으로 써 놓았다. 통역관으로 청나라를 자주 드나들었던 제자 이상적이 사신으로 다녀올 때마다 귀한 책들을 구해서 추사에게 주었는데 그 답례로 그려준 그림이다. 이상적은 이 그림을 청나라에 가지고 가서 지인들에게 보여주게 되고 그 유명인사들이 세한도에 대한 글을 써주는데 이것들이 세한도에 부가되어 있다. 공자의 말씀을 모아놓은 책 논어에 '날이 추워진 연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는 말에서 세한이라는 말을 따 세한도라고 명명했다. 제주도에서 외롭게 유배생활을 하는 스승 김정희 선생을 잊지 않고 돌봐준 제자에 대한 고마움이 절절하게 표현된 그림인 것이다. 추사선생은 1850년에서 1851년동안 북청에서 다시 유배생활을 하게 되는데, 유배를 끝내고서도 권력에 복귀하지는 못했다. 총 12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는 추사는 아버지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저술, 작품활동을 하였는데 이 때 강남에 있는 봉은사를 출입하면서 판전 현판글씨 등 작품을 남기게 된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