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산초당은 정약용의 유배지다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 기슭에는 다산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초당이 있다. 초당이라면 초가집을 말하는 것인데 현재시설들은 모두 기와집으로 되어있다. 이는 선생님 사후에 복원하면서 당시와 다르게 기와집으로 복원한 때문이다. 아마, 초가집은 내구성이 부족하여서 관리하기 힘들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당시모습 그대로 복원 보존하지 않은 것이 좀 아쉬웠다. 다산은 강진의 귤동에 있는 산 이름이다. 이 기슭에서 오랬동안 유배생활을 하셨으므로 정약용 선생이 자신의 호로 삼은 것이다. 당시 선비들은 이름을 부르기 보다 호를 불렀다. 이름은 부모님으로 부터 받은 소중한 것이라 함부로 부를 수 없고 호는 허물없이 부를 수 있도록 정한 호칭인 것이다. 이 유적지에는 다산초당, 다산동암, 다성각(서암), 천일각 등 건물이 있다. 각 건물에는 유려한 한문 붓글씨로 편액들이 부착되어 있다. 다산초당이라는 현판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를 집자하여 모각한 것이고, 다산동암이라는 글씨는 다산선생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라 한다. 집자라고 하는 것은 이곳 저곳에 쓰여있는 글씨를 복사해 가져오는 것을 의미하고, 그 글씨를 나무 등에 새겨놓은 것을 모각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산동암은 선생께서 주로 기거하신 장소이다. 2000여권의 책을 구비하고 저술활동을 하신 곳이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기도 하다. 다성각(서암)은 윤종기를 비롯한 18인의 제자가 기거하면서 학문을 토론하던 곳이다. 천일각이라는 정자는 다산유배시절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최근에 지은 건물이다. 다산선생께서 자신을 아껴주었던 군주인 정조, 흑산도에 유배가 있던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때면 올랐을 언덕에 건축한 것이다. 천일각 바로 옆에는 백련사 가는 길이 있다. 백련사에는 유배생활동안 벗이자, 스승이면서 제자였던 혜장선사가 있었다. 참고로 다산 4경은 빠뜨리지 말고 찾아 감상하시길 바란다. 다산초당 제1경은 초당 왼쪽바위에 새겨진 글씨(정석이라고 한문으로 쓰여있음), 제2경은 약천으로 가믐에도 마르지 않는 샘, 제3경은 연못가운데 돌로 쌓아 만들어진 석가산, 제4경은 초당 앞마당에 있는 바위로 다조라고 부른다. 이 바위에서 다산은 솔방울로 차를 끌여서 즐겼다고 한다.
2. 천주교로 평생 고통 받은 다산
다산 정약용은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능내면 조안리에서 태어났다. 현재 그 곳에 가면 생가, 실학박물관 등 유적지가 잘 보존되어 있다. 다산은 그를 매우 아끼던 정조가 서기 1800년에 갑자기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 고난이 시작된다. 그의 관직생활은 정조의 치세와 맞닿아 있다. 정조가 승하하자마자 정약용도 고난이 시작된다. 다산은 대과에 급제 후 정조가 설치한 규장각에서 공부하였고 사간원, 홍문관의 요직을 역임하였으며, 1791년에는 수원화성 설계에 참여하여 거중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외 많은 요직은 거쳤지만 조선정부의 천주교 박해가 일어날 때마다 어김없이 큰 곤욕을 치르곤 했다. 1791년 신유박해때는 충청도 해미에 귀향갔으나 다행히 11일만에 풀려 나기도 했고, 1795년 을묘박해 때는 벼슬이 7등급이나 좌천되었다.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때에는 급기야 귀향을 가서 강진 등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정약용이 천주교를 접한 것은 당시 실학의 일파인 성호 이익 계열과 학연을 맻은 것에서 출발한다. 서기 1776년 이가환, 이승훈과 학연을 맻게 되는데 성호 이익 계열로 이들은 서양학문과 천주학을 많이 연구하던 터라 정약용도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다. 1784년 큰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설명듣고 매료되어 이벽으로부터 세례를 받아 천주교인이 되었다. 1791년에 발생한 신유박해는 윤지충이라는 사람이 모친의 장례를 치른 후 제사를 폐함으로써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사건, 즉 진산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윤지충의 행위는 유교의 핵심원리인 충효사상과 크게 충돌하는 개념이라서 천주교는 사악한 종교로 낙인이 찍히게 되고 이 사건으로 정약용은 천주교와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정약용의 가까운 친인척들이 대부분 골수 천주교 신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신유박해의 계기를 제공한 윤지충은 외사촌 형,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고 선교운동을 주도한 이승훈은 매부, 천주교 교리 연구회장인 정약종은 세째형, 형제들도 모두 천주교인들이었다. 일부는 배교하고 일부는 끝까지 천주교를 신봉하였지만 천주교 탄압을 자기 정파의 이익추구에 활용한 당시 집권세력의 탄압 앞에서는 배교 또는 천주교를 오직 학문적 측면에서 연구하였다는 따위의 주장은 통하지 않았다. 반대 정파에서 추구하는 것은 상대파의 죽음, 즉 목숨이었기 때문이다. 정조가 갑자기 승하(임금의 죽음을 높여 부르는 단어)한 다음 해인 1801년에 신유박해가 발생하였다. 천주교 세력이 크게 탄압을 받아 많은 신자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숙청을 당하게 되는데, 이때 다산 정약용도 투옥되어 국문을 당하였다. 다행히 국문을 할수록 정약용과 형 정약전이 명백하게 배교했다는 물증들이 솟아져 나와, 두 형제는 유배로 감형되었다.
3. 다산 유배생활을 학문의 기회로 활용
1801년에 다산선생은 신유박해 때 결국 유배형에 처해지고 결국 강진으로 오게 되었다. 1808년부터는 현 위치에 외가인 해남 윤씨 집안에서 마련해준 초당에서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다산은 조선 후기 자생적 개혁운동인 실학을 집대성한 실학자이자 개혁가이다. 22세때 과거시험 초시에 합격하고 28세때 대과에 2등으로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아가 국왕인 정조의 사랑을 받았지만, 조선의 개혁방안의 하나로 공부하였던 천주교(서학)로 인해 천주교 박해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탄핵을 받은 것이다. 다산선생에게 서학의 철학체계는 매력적이어서 조선 개혁에 참고할만 학문이었으나, 어렸을 때부터 배워 신념체계로 굳어진 유교사상, 특히 조상에 대한 봉제사를 폐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조하기 어려워서 결국 배교(천주교를 배척)하고 멀리하였으나 과거 이력과 친인척들의 종교적 신념때문에 인생의 말년 대부분을 유배의 고초를 당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유교가 국가의 기본사상이고 윤리였던 조선에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천주교 식으로 우상숭배로 배척하는 것이 보수 유학자가 중심인 집권세력들에게는 좋은 공격대상이었다. 유배의 역경속에서도 다산선생은 많은 제자들을 교육시키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총 600여편의 책을 저술한다. 본격적인 유교 경전연구(논어 등 원문에 주석을 다는 학문인 경학연구 중심)에 매진한 것이다. 심지어 복숭아뼈가 3번이나 구멍뚫리는 고통을 이기고 책을 저술하였다고 한다. 역경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최선을 다해 지식인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자세는 높이 평가 받아 마땅하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한국인들이 존경하는 위인중의 한 명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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