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시습의 금오신화 현장
우리나라의 최초 한문소설은 김시습의 ‘금오신화’로 알려져 있다. 매월당 김시습이 조선 세조때 경주 남산인 금오산 용장사에서 쓴 소설이다. 금오신화는 중국의 ‘전등신화’를 본떠서 쓴 것이다. 이러한 형식은 당시 한국, 중국, 일본 등 동북아 3국에서 크게 유행하였는데, 이 전등신화도 실은 당나라때의 소설을 따라한 것으로 고금의 괴담을 역은 전기소설인 것이다. 김시습은 조선전기의 문신이자 생육신의 한사람이다. 조선 전기의 역사를 보면 계유정난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이 나온다. 이 사건은 조선 4대왕 세종의 아들중 하나인 수양대군이 조선 6대왕인 단종(수양대군의 조카)을 몰아내고 7대왕 세조가 된 정치사건이다. 이 사건에 반대하여 죽음으로 충절을 지킨 6명의 신하를 사육신, 목숨을 부지하였지만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반 미치광이 행세 등 소극적으로 반항한 6명의 신하를 생육신으로 칭하는데, 매월당 김시습은 그 생육신의 한 사람인 것이다. 머리가 매우 좋아서 그 시절 천재로 알려진 매월당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자마자 정치에 뜻을 버리고, 승려가 되어 조선 전국을 유람하였다. 세조 11년(서기 1465년)에는 경주 금오산의 용장사에서 금오신화를 비롯한 다양한 저술활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현존하는 금오신화속 소설은 ‘만복사 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 등 5편이다. 이 5개 소설 중 사건 현장이 구체적으로 나타는 것은 ‘취유부벽정기’의 현장인 대동강변 부벽정, ‘만복사저포기’의 현장인 전라도 남원시에 있는 만복사 등 두 곳이 있다. 이 글에서는 ‘만복사저포기’와 그 현장을 알아보기로 한다.
2.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사랑
‘만복사저포기’ 대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려서 고아가 된 양씨 성을 가진 총각이 만복사에 살고 있었다. 부처님탄신일인 사월 초파일은 날씨가 온화하여 만물이 생동하고 꽃들이 만발하는 좋은 계절인데, 노총각인 양씨 총각은 일가친척없는 쓸쓸한 처지라, 초파일 모든 행사가 끝난 한적한 저녁에 대웅전에 들어가서 부처님께 하소연을 하게된다. 그러면서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부처님과 저포놀이로 내기를 하자고 하는 것이다. 양씨 총각이 첫번째 던지는 것은 부처님이 던지는 것으로, 두번째 것은 양씨 총각 자신의 것으로 하자고 하면서 만일 자신이 이기게 되면 부처님께서 소원을 들어줘야 한다고 스스로 정한 것이다. 다행히 이 저포놀이에서 양씨 총각이 이기게 되는데, 부처님께 소원을 빌기를 ‘아름다운 처녀를 아내로 달라’고 하였다. 그렇게 기도를 한 후 부처님 뒷편 공간에 숨어서 지켜보게 되는데 조금 있으니, 아주 예쁜 처녀가 와서 기도를 하였다. 가만 기도내용을 들어보니 그녀도 ‘자신의 신세를 비관하면서 아름다운 신랑으로 배필을 정해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부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준 것으로 생각한 양씨 총각은 처녀 앞으로 나아가 저포놀이를 하여 부처님을 이긴 사정, 자신의 기도 등 전체 상황을 설명하면서 ‘이는 부처님께서 혼인을 맺어 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처녀도 부끄럽지만 뜻을 받아들여 부부가 되기로 한다. 그래서 그 둘은 그 밤에 결혼을 하고 합방을 한다. 다음날 날이 새기 전에 처녀가 자기집으로 가자로 해서 같이 새벽길을 나서게 되는데, 이상한 것은 길에서 만난 동네사람 눈에는 양씨 총각만 보이고 그 처녀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 둘은 개녕동이라는 동네로 가서 행복하게 몇 년을 살게 되는데, 그러던 어느 날 그 ‘처녀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헤어질 날이 왔다’고 말한다. 사실은 ‘자신은 왜란(고려말 일본출신 해적들을 의미하는 듯)에 억울하게 처녀몸으로 죽은 원혼인데, 부처님의 은혜로 그동안 양씨 총각과 결혼생활을 하였는데 이제 그 인연이 다해서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양씨 총각은 절에서 처녀부모들이 지내는 제사에 참석하고, 귀신인 아내와 이별을 고한 후 지리산에 들어가 자기 아내를 그리워하며 여생을 마쳤다고 하면서 소설은 끝난다. 이처럼 비현실적이면서도 매우 아름답고 안타까운 사랑이야기가 ‘만복사저포기’인 것이다.
3. 만복사와 주변 관광
전라북도 남원에 있었던 만복사는 김시습이 활동하던 시절에는 매우 큰 사찰이었던 것 같다. 전해져 오는 내용으로는 도선국사(신라말 고승, 풍수지리설 도입)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이는 과장된 내용인 듯하다. 기록을 찾아보면 동국여지승람이라는 책에 11세기 고려문종때 건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러 기록에 보면 만복사는 매우 큰 사찰로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과 수백명의 승려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아깝게도 이 큰 절 만복사는 1597년에 발발한 정유재란(1592년 임진왜란에 이어 일본군의 2차 침입)때 일본군에 의해 화재로 불타고 이후에는 중건되지 못하였으며 현재는 절터만 쓸쓸하게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장군이 해로 차단, 권율장군 등의 웅치 전투 승리 등으로 전라도는 전란의 피해를 입지 않았으므로 만복사도 온전했었다. 그런데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끈 조선수군의 궤멸로 인해 일본군을 전라도를 침범하여 남원성, 전주성을 함락하게 된다. 이 남원성 전투 때에 만복사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남원에 가면 ‘만인의 총’이라는 무덤도 볼 수 있는데 이 무덤도 정유재란시 남원성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조선군과 백성들의 무덤인 것이다. 무려 만명이라는 생명이 전사하였으니 정말 처절한 저항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만복사 절터에 가면 ‘만복사지 5층석탑’, ‘만복사지 석좌’, ‘만복사지 당간지주’, ‘만복사지 석불입상’ 등 많은 석물 들이 남아서 옛 영광을 쓸쓸하게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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