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울 삼전도비, 잊지못할 치욕의 증거
서울 잠실 석촌호수 부근에는 삼전도비가 서있다. 높이 3.95m, 폭 1.4m이다. 정식명칭은 서울 삼전도비 또는 대청황제공덕비이다. 우리나라 역사유적인 효자비나 열녀문 등을 보호하는 전통방식과 다르게 이 비석은 철제 기둥과 유리 지붕으로 보호되어 있다. 비석이 비바람에 의해 마모 침식되는 것을 방지할 뿐이지 소중한 문화재는 아니라는 숨은 뜻이 있어서 이렇게 취급되는 것 같다. 삼전도비 옆에는 받침대 하나가 비석없이 놓여있다. 청나라 측에서 처음 만든 비석 받침대를 맘에 안들어 해서 새로 제작하였던 것, 즉 갑질을 한 흔적이다. 비문은 1637년에 도승지 및 예문관 제학이었던 '이경석'이 지었고 글씨는 한성판윤이면서 한석봉의 제자인 '오준'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다. 청나라에 항복하게 되는 사건, 즉 병자호란의 진행상황과 비석건립과정은 다음과 같다. 서기 1636년(인조 14년) 12월 6일 청태종은 12만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침공을 시작하여, 12월 15일에 한양이 함락된다. 인조는 당초 강화도로 도망가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남한산성으로 피난하는데 1637년 1월 22일 강화도가 함락되자, 1월 30일 삼전도에 나가 청태종에게 항복을 했다. 청나라는 1637년 3월에 대청황제공덕비를 세우라고 명령을 하고, 동년 11월3일 비석을 세울 단을 준공하자, 동년 11월 25일에는 사신(마부대)을 보내 검수하게 한다. 1639년(인조 17년)에 비석이 완성되었다.
2. 삼전도 굴욕의 날 항복의례
남한산성에서 공방전이 이루어지는 동안 막후에서는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조선 정부의 치욕은 오랑캐에 머리를 조아리고 군신의 관계를 맻은 것이며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은 것이었다.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용포(임금의 옷)를 벗고 청색 옷으로 갈아입은 후 어가를 타지도 못하고 백마를 타고서 서문을 나와 삼전도로 향하였다. 신하이므로 용포를 입을 수 없었고, 죄를 지었으니 정문으로 나올 수 없었으며, 항복을 하였으니 백마를 탄 것이었다. 인조는 세자와 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나라 군사들의 호령에 따라 '삼궤구고두례'를 행하였다. 당시 조선정부가 항복협상을 잘 했는지 항복의 형식이 그리 비참한 것은 아니었다. 항복의식으로 삼궤구고두례를 행하는 것에 그쳤기 때문이다. 절을 세번하고 머리를 아홉번 조아리는 것인데, 이것은 신하 나라가 큰 나라를 만났을 때 행하는 예법이었다. 중국의 전통적인 항복의식은 함벽여츤(銜壁輿櫬, 옥을 입에 물고 관을 등에 진다는 의미)이었다. 항복하는 나라의 인장을 바치고, 아울러 스스로 시체에 입히는 옷을 입으며, 머리를 풀어 헤친 후 관을 등에 지고 항복하는 의식인 것이다. '머리를 풀어헤친다'는 것은 '죄인이나 다름없다'는 의미이고, '관을 등에 졌다'는 것은 '자신을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인조가 함벽여츤 의식을 행하였다면 전쟁 후에 인조의 권위는 다시 세울 수 없었을 것이며 조선은 그때 멸망하였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청나라는 자국의 대외적 권위만을 확립하는데 그쳤고, 항복을 받고나서 오래지 않아 본국으로 철군하였다. 청군이 서둘러 항복을 받고 철군한 것은 당시 조선에 유행하던 천연두가 청나라 군사에게 전염되는 것을 염려한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만주족은 유전적인 특성상 조선인이나 한인보다 천연두에 취약하였는데, 청태종도 천연두 항체가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3. 전쟁패배의 피해는 죄없는 백성 몫
삼전도 굴욕을 계기로 조선은 청나라와 조공책봉관계를 맺게 되었다. 명나라와 단교를 하고, 왕자와 대신들을 볼모로 보냈다. 청나라의 신하국으로서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할 때는 원병을 파병하기로 약속했다. 조선의 많은 백성들이 청나라에 노예로 끌려갔다. 이러한 나라의 재앙과 백성들의 고초보다도, 소중화 사상(명나라가 망한 후 공자로부터의 유교전통을 조선이 물려받았다는 생각)에 찌든 조선 사대부들에게는 삼전도비가 치욕의 역사였다. 그 비문은 조선정부에서 써서 청나라 허락을 받았고, 조선이 자발적으로 건립한 형식이었으니, 씻을 수없는 수치였다. 어쩔 수 없이 비문을 쓴 이경석(문충공, 영의정 등 보직)이나 글씨를 쓴 오준은 죽을 때까지 후회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의 재발을 막기위해서는 그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경석이 발탁하여 성장시킨 우암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세력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해준 은혜를 저버리고 오랑캐들에게 머리를 조아렸다고 공격하였다. 심지어 백헌 이경석 무덤앞 비석의 내용을 정으로 쪼아 파내버리기까지 했다고 한다. 인조를 이어 임금된 효종과 노론세력은 북벌을 주장하였으나, 과연 전쟁수행 능력이나 의지가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오직 그들 정파의 이익, 정권장악 유지를 위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이데올로기로 이용한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결국 청나라의 선진문물, 청나라를 통해 들어올 수 있었던 서양의 과학지식을 배척함으로써 자주적 근대화 기회를 상실하는 원인이 되었다. 삼전도비는 치욕이라는 단어를 빼고는 설명이 불가능한 유적이지만 역사는 가슴아파도 되돌아 보아야하고 교훈으로 삼을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측면에서 벽안시 하지 말아야 할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의 중요한 장소다. 청나라 사신들은 조선에 올 때마다 이 비석을 살피는 것이 필수 코스였다. 그들에게는 영광이기도 하고 조선이 변심하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척도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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