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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문화

북관대첩비, 임진왜란 때 맹활약한 의병장 승전기

by Sage 역사인문여행전문가 2023.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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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진왜란은 동북아시아 국제 전쟁

1592년(선조 25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우리나라에 침공해온 일본과의 7년전쟁이 임진왜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전쟁시작년도와 침략주체를 나타내기 위해 '壬辰倭亂'이라 부르지만 일본에서는 '분로쿠-게이조의 역(文錄-慶長의 役)', 중국에서는 '만력의 역(萬曆의 役)'이라 불린다. 文錄-慶長은 일본, 萬曆은 중국의 당시 연호(年號, 동양 군주국가에서 자신이 다스리는 기간을 부르는 명칭, 즉 군주 자신만의 달력)였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당시 조선)는 쇄약해질대로 쇄약해져 있었다. 정치적으로 연산군 이후 훈구파와 사림파의 싸움인 사화(士禍)가 계속되었고, 동서(東人, 西人)로 나눈 붕당의 당파싸움은 국정을 극도의 혼란에 빠뜨리고 있었다. 군사적으로도 조선초기의 국방체계가 무너지고 국방을 위한 합의기구인 비변사는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성리학의 나라 조선은 당시 중국 명나라에 사대하였으나 국제정세 변화에 둔감하였다. 당시 유럽의 대항해시대 도래 및 일본의 통일 등 국제정세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였다. 침략국가인 일본은 새로운 정치 경제 체제가 싹트고 있었다. 일본은 유럽의 대항해 시대의 영향을 받아 유럽의 상인들과 서양문물과 기술이 유입되어 기존의 봉건지배구조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딱 100년전인 1492년에 스페인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래 시작된 대항해의 시대가 동북아시아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이 전국시대(戰國時代, 온 나라가 성 단위의 작은 단위로 나뉘어 서로 전쟁을 한 약육강식의 시기)를 거쳐 통일기운이 싹텄으며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 실권자는 오다노부나가 뒤를 이은 도요토미히데요시였다.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일본 국내 통일에 성공한 후, 오랜 싸움기간동안 쌓인 강력한 무력을 이용하여 조선을 침략한 것이다. 중국은 당시 명나라시대였으며 환관들의 준동으로 국내정치가 매우 어지러워 내란이 끊이지 않아 국력이 약해지고 있었다. 만주지역은 명나라의 지배아래 있었으나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는 명분뿐이고 실상은 각 부족으로 나뉘어 자치적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여진 부족의 하나인 건주여진이 강성해져서 만주지역을 통일하고 있었다. 이 세력은 향후에 청나라를 건립한 후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대륙의 주인이 된다. [대략적인 임진왜란 진행상황] 전쟁발발 초년도는 조선 정규군이 크게 패하였으나, 육지에서 의병 및 승병, 해상에서 이순신 장군 활약, 명나라의 참전으로 반격의 실마리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1592년 음력 4월 14일 오후 5시에 일본은 군사 약 20만명으로 부산항에 침입하였다. 4월 24일 상주에서 이일이 패해 10일만에 경상도가 일본군 수중에 넘어갔다. 4월 28일 신립장군의 조선군은 충주 탄금대에서 크게 패했다. 5월 2일 일본군은 한양을 점령하였다. 5월 2일 옥포해전에서 이순신이 이끈 조선수군 승리.  6월 13일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조선왕 선조는 4월 28일 파천을 결의하고 4월 30일 의주를 향해 궐문을 출발하였다. 선조는 6월 22일 명나라 망명을 결심하고 6월 27일 명나라 허락을 받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8월 14일 이순신장군이 이끈 조선수군이 한산도 대첩 승리. 10월 수원인근 독산성 전투에서 권율장군 승리. 1593년 1월18일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평양성을 수복하다. 4월18일 한양 탈환, 4월 명나라 경은 휴전회담 시작하였다. 이후 1597년 상반기까지는 휴전협상이 진행되었다.  일본군은 전라도, 경상도 및 충청도를 느슨하게 점령한 상태에서 전쟁은 소강상태였으나 협상결렬로 일본은 14만 군대로 다시 조선을 침입하니, 이것을 정유재란이라고 부른다. 양력 8월 27일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이 이끈 조선수군은 궤멸되었다. 남해안 제해권을 장악한 일본 육군은 9월 25일 남원성, 9월 29일 전주성을 함락함으로써 전라도를 점령하고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하여 조명 연합군과 대치하였으나 더이상 북상하지는 못하였다. 10월 26일 복직한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 승리. 1998년 9월 18일 도요토미히데요시 사망하자 일본군은 극비리에 철군하기 시작한다. 12월 16일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 순국하다. 조선에서의 전쟁은 일본군이 가지고 있던 전쟁개념과는 양상이 매우 다르게 전개되었다. 일본에서의 전쟁은 성이 함락되면 성주는 할복하고, 백성들은 항복하여 해당지역이 평정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성주는 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순간 더이상 성주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임금 선조가 수도 한양을 버리고 도망갔는데, 신하는 끝까지 충성하였다. 일반 백성들은 항복하기는 커녕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게 결사항전하였다. 이러한 민족성의 차이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전쟁수행에 큰 장애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2. 정문부 의병장 활약으로 함경도 수복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려나 유학자들이 동료 및 제자들을 모아 의병을 일이켰으니 7년 전쟁기간동안 약 2만 6천명(1593년 1월에 명나라 군에게 통보된 의병수)이 참전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들은 무기나 전술면에서는 열세였지만, 지리에 익숙한 잇점을 살려 적절한 전술로 일본군에 큰 타격을 줬다. 의병들은 일본군의 보급로 및 교통로를 차단함으로써 임진왜란 초기에 관군이 재정비하여 대일 항전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의병장중에서 함경도에서 활동한 의병장 정문부 장군은 그 혁혁한 전공이 역사적으로 평가받지 못하였고 우리나라 국민들도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참 안타깝다. 정문부 장군은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군에 의해 일찍 점령당한 함경도 지역을 회복한 의병장이다. 1592년 7월 15일 가토 키요마사가 이끈 일본군 22,000명은 함경도 안변, 영흥, 함흥을 거쳐 단천에 도착했다. 함경도 병마절도사 한극함은 해정창 전투에서 조선 기병으로 일본과 싸웠으나 크게 패하였다. 이 패배로 인해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군에 귀순하게 되는데, 특히 회령의 국경인은 반란을 일으켜 조선왕 선조의 아들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아 가토에게 바쳤다. 이때에 정문부 장군은 의병을 일으켜 국경인-국세필을 참수하고, 명척 및 길주에 주둔한 왜군들과 장덕산 전투, 상포 전투, 백탑교 전투 등에서 대승하여 관북지방을 완전 회복하였다. 이렇게 큰 공을 세운 정문부 장군이지만 전쟁이 끝난 후 조선정부의 논공행상에서는 박하게 평가를 받았다. 북관대첩은 이순신의 한산대첩이나 권율의  행주대첩에 결코 뒤지지 않을 큰 전공인데도 이런 전과를 조정에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영흥부사와 길주목사에 제수되는 정도. 1599년 이후 호조참의, 예조참판, 장단부사, 안주목사 등을 연임하였으나 이괄의 난때 누명을 쓰고 옥중에서 장사(매맞아 죽음) 하였다고 전해진다. 정문부 장군은 북인계열이었는데 광해군 당시에 정권에 적극 협조한 것도 아니었지만 서인들의 인조반정 성공 후 일어난 이괄의 난(1624년, 인조 2년)때 누명을 쓴 것이다. 장군이 창원부사 시절에 지은 시가 있었는데 초나라 회왕에 대한 것이었다. 초 회왕은 충신 굴원을 멀리한 전국시대의 암군으로 악명높은 인물인데 이 시가 당시 임금인 인조를 빗댄 것이라고 간신배들이 모함을 한 것이다. 향후에 신원이 회복되어 시호를 충의공으로 받았으나 전쟁영웅으로서 얼마나 억울한 죽음인가? 장군은 옥중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후손들에게 유언하기를 앞으로 절대 벼슬을 구하지 말고 경상도 진주로 내려가 살라고 하였다. 장군이 창원부사 시절에 진주를 둘러보고 그 풍토나 사람들에게 반했던 것 같다. 그래서 진주에 장군을 모시는 충의사가 있고 정씨 집성촌이 있다.

3. 북관대첩비 내용은 승전의 기록

경복궁 서편에 북관대첩비가 있다. 이것은 모사품인데 독립기념관 및 장군묘역(의정부)에도 똑 같은 것이 있다. 진품은 북한 함경도 길주에 있고 북한의 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고 한다. 북관대첩비는 함경도 의병장 정문부가 왜장 가등청정과 싸워 이긴것을 기념해 조선조 숙종 34년(1707년)에 함경도 길주에 건립한 것이다. 높이 187cm, 너비 66cm, 두께 13 cm로 약 1500자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1905년 일본군 2사단 17여단장 이케다 마시스케 소장이 일본으로 강탈 반출하여서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구석진 곳에 처박아 둔 것을 2005년도에 반환받은 것이다. 언젠가 통일이 되면 함경도 길주에 가서 우리는 그 진품을 볼수 있을 것이다. 어서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 [북관대첩비문 원문 및 번역] 咸鏡道 壬辰義兵 大捷碑文 (북관대첩비문) 在者壬辰之亂其力戰破敵雄嗚一世 水戰則有 李忠武之 閑山島焉 陸戰則有 權元師之 幸州焉 有 李月川之 延安焉 史氏記之 遊談者稱之 不倦 踓然此猶有位地 資於乘賦什伍之出也 若起卑微 奮逃竄徒 以忠義相感激 卒能用鳥合取全勝 克復一方者 關北之兵爲最 始萬歷中倭酋 秀吉 怙强驁逆 規犯 中國 怒我不與假道 遂大入寇 長驅之都 宣廟旣西幸而列都瓦解 賊已陷 京畿 其驍將二人 分兵首兩路 行長行朝西 淸正主北攻其秋 淸正入北道兵銳甚 鐵嶺以北無城守焉 於是 鞠敬仁等叛應賊 敬仁者 會寧府吏也 素惡不率 及賊到富寧 隙危煽亂 執王子及宰臣奔播者 竝縛諸長吏與賊效款 鏡城吏 鞠世必其叔父也 及 明川民 末守 木男 連謀相黨 幷受賊所署官 各據州城聲張勢立 殺脅惟所指 數州崩駭 人莫自保 鏡城 李鵬壽學氣士也 奮曰縱國家創攘至此兇徒敢爾耶 乃潛與 崔配天 지達源 姜文祐 等謀起義兵 諸人地相夷 莫適爲將 評事 鄭文孚 有文武才 無兵可戰 脫身匿山谷間 聞義兵起 欣然從之 遂推鄭公爲主將 鐘城府吏 鄭見龍 慶源府吏 吳應台 爲次將 歃血誓義 募兵得百餘人 時北虜又侵北邊 諸公使人誘 世必 幷力禦北虜 世必許之 內義兵州城 明朝 鄭公建旗鼓上南城樓 誘 世必上알 時其入目文佑禽之 斬以徇 赦其脅從 郎引兵南趣 明川 又捕 末守等斬之 會寧人亦討 敬仁誅之 以應義兵 軍勢稍壯 來附者益衆 吉州人 許珍 金國信 許大成 亦聚兵爲聲援 當是時 淸正令褊將領精兵數千據 吉州 身率大軍屯南關以頀之 十一月遇于加披將戰鄭公副署諸將見龍爲中衛將 屯白塔 應台及 元忠恕爲伏兵將 分屯 石城 ○會韓人濟爲左右衛將 屯木棚 柳敬天爲右衛將○○河 金國信 許珍爲左右斥候將 ○○○○○分屯 臨溟方峙 賊狃勝不甚備 諸軍幷起揜擊乘銳蹙之 土無不疾呼先豋者 賊敗走 縱兵追之殺其將五人 斬獲無數 盡奪其馬畜兵械 ○○○遠近響震 ○○應之 衆至七千餘人 賊遂入 吉州城 窘不敢動 列伏于旁陿邀其出輒剿之 已而城津賊大拔于 臨溟 率輕騎○○○倦其還 決擊大破之 又斬數百餘人 遂剖其腹腹暴之大路 於是兵聲大桭 賊益畏之 十二月又戰于 雙浦 戰方合令褊將 引數騎橫衝迅如風雨 賊失勢不及交鋒 皆散走 乘勝又破之 明年正月 又戰干 端川 三戰三勝 還屯 吉州休士 旣而 淸正知軍不利 遣大兵迎還 吉州賊 我軍尾擊至白塔大戰又敗之 是役也 李鵬壽 許大成 李希唐 戰死 然賊遂退不敢復北 當是時○○明將 李如松 亦破 行長於 平壤 鄭公乃使 崔配天間行奏捷于行在 上引見流涕贈鵬壽司憲府監察 賜 配天秩朝散 觀察使怒 文孚不稟節度而疾義兵功聲出已 聞奏率以誣揜 以故○○○○○ 顯宗時 觀察使 閔鼎重 北評事 李端夏 聽於父老以實聞 於是贈 文孚贊成 鵬壽持平 餘人贈官有差 又建祠 鏡城 ○○賜額曰彰烈 今上庚辰昌大爲北評事 旣與義施之子孫 訪聞前故 得事蹟爲詳 然慨想諸公風 又常餘所謂○○觀其營辟戰陣之所 徘徊持顧不能去 語于長者曰 島夷之禍烈矣 三島復而八路壞 諸公出萬死一生 提孤軍摧勁구 使我國家興主舊地 卒免於在衽而邊塞之人 興於聽聞 效於忠義者 又誰之力也 幸州 延安俱有碑碣 載事華烈 東西膽式 以 關北之功之盛 而獨闕焉庸非諸君之恥歟 咸應曰然 惟鄙人志矧公之命 遂伐石鳩財以人來請文 辭非其人 又來曰斯役也公實首議 不得命 將綴 余乃敍其事繼之銘曰有盜自南 我王于藩 屹屹北原 有蠢者氓譽我大邦 以國受鋒 狼籍穴墉 不抗以從 血口胥呑 士也걸걸 兵義莫利 旣纖叛徒湯毒以凶 峻群攸同 不屑戈了 구莫我衝武夫聲呼 師征孔赫 協底帝罰 北土旣平山摧海涵 厥酋崩惱 非私我忠 爾蠶我農大君曰咨 贈官命祠 士風其烈 臨溟之厓孰尙女功 光惠始終 民可卽戒 有石○○刻之誦詞用眠無窮 옛날 임진란에 힘써 싸워 적을 깨뜨려 일세를 크게 울린 이로 해전에서는 이 충무의 한산대첩이 있고, 육전에서는 권 원수의 행주대첩이 있으며, 이 월천(李月川)의 연안(延安) 대첩이 있어, 역사가가 그것을 기록하였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칭송하여 마지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지위가 있어 말과 부역과 군졸들을 낼 수 있음에 힘입은 것이다. 고단하고 미약한 데서 일어나 도망하여 숨은 무리들을 분발시켜 충의로써 서로 격려하여 마침내 오합지졸을 써서 완전한 승첩을 거두어 한쪽을 수복함과 같은 이는 관북의 군사가 제일인 것이다. 처음 만력 중에 왜의 추장 풍신수길이 강한 군사들을 믿고 거만하게 중국을 침범하고자 엿보다가 우리가 길을 빌려 주지 않음을 성내어, 드디어 크게 쳐들어와 서울에까지 이르렀다. 선조는 이미 서쪽으로 거동하였고, 모든 고을이 무너졌으며, 적은 이미 경기도를 함락시키고 그 무서운 장수 두 사람이 군사를 두 길로 나누니 행장(行長)은 행조(行朝)를 뒤밟아 서쪽으로 가고 청정(淸正)은 북방 침공하는 것을 맡았었다. 그 해 가을에 청정이 북도로 들어갔는데 적의 정예한 군대가 매우 거세었기 때문에 철령(鐵嶺) 이북은 성을 지키지 못했다. 이 때에 국경인(鞠景仁) 등이 반역하여 적에게 내응하였다. 경인은 회령부의 아전으로 본성이 악하여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적이 부령(富寧)에 이르자 그 위기를 타고 난을 일으켜 피난해 온 두 왕자와 대신을 잡고 그리고 장수와 관리들을 묶어 적에게 주고 정성을 보였으며, 경성(鏡城) 아전 국세필(鞠世弼)은 그의 숙부요, 명천(明川) 사람 말수(末秀), 목남(木男)과 서로 무리를 지어 모두 어울려 적이 주는 관작을 받아 각각 고을을 점거하고 성세를 벌여 죽이고 위협하기를 그의 지령대로 하니, 여러 고을이 무너지고 겁내어 인민들이 스스로 보전하지 못했었다. 경성(鏡城) 이붕수(李鵬壽)는 의기 있는 선비라, 분개하며 말하되 "비록 국가의 어지러움이 이에 이르렀으나, 흉도가 감히 저렇게 할 수 있겠는가?"하고 최배천(崔配天) 지달원(池達源) 강문우(姜文佑)등과 함께 의병 일으키기를 꾀했는데 여러 사람의 지위가 서로 비슷하여 장수 삼을 이가 마땅치 않았다. 평사 정문부(鄭文孚)는 문무의 재주는 있으나 군사가 없어 싸울 수 없으므로 몸을 빼어 산골에 숨어 있던 중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듣고 즐거이 좇았던 바, 마침내 정공을 추대하여 주장을 삼고 종성부사(鍾城府使) 정현룡(鄭見龍)과 경원부사(慶源府使) 오응태(吳應台) 등을 차장으로 삼아 피로써 맹서하며 의병을 모집하여 백여명을 얻었다. 그때 북쪽 오랑캐들이 또 북쪽 변방을 침범하므로 여러 장수들이 사람을 시켜 세필을 달래어 같이 힘을 합하여 오랑캐들을 막자 하니 세필이 허락하고 의병들을 성안으로 받아들였다. 이튿날 아침 정공이 기(旗)와 북을 세우고, 남문으로 올라오도록 꾀어 그가 현신할 때에 문우(文佑)가 그를 사로잡아 목을 베어 조리돌리고, 그의 위협에 못 이겨 따른 자들은 놓아주었다. 그리고 곧 군사를 이끌고 명천(明川)으로 가서 말수(末秀) 등을 잡아 목베고 회령 사람이 또한 경인을 쳐서 목베어 의병에게 호응하니 군세가 점점 커지고 따라와 붙는 자가 더욱 많아졌으며, 길주 사람 허진(許珍) 김국신(金國信) 허대성(許大成)이 또한 군사를 모아 성원하였다. 이때에 가등청정이 편장(偏將)으로 하여금 정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길주에 웅거케 하고 자신은 대군을 거느리고 남관(南關)에 진을 쳐 호응하고 있었다. 11월에 적을 가파리(加坡里)에서 만나 싸우려는데 정공은 여러 장수들을 배치하되 현룡은 중위장(中衛將)을 삼아 백탑(白塔)에 진을 치고, 오응태 원충서는 복병장을 삼아 석성(石城)과 모회(毛會)로 나누어 진을 치고, 한인제(韓仁濟)는 좌위장을 삼아 목책(木柵)에 진을 치고, 유경천(柳擎天)은 우위장(右衛將)을 삼아 날하(捏河)에 진을 치고, 김국신 허진은 좌우 척후장을 삼아 임명과 방치(方峙)로 나누어 진을 치게 했는데, 적들은 여러 번 이긴 끝이라 방비를 허술하게 했다. 우리 군사들은 모두 함께 일어나 불의에 공격하여 기운을 얻어 밀고 나갔는데 고함치며 앞서 나가지 않는 군사가 없으니 적이 패하여 달아났다. 그 군사를 추격하여 장수 5명을 죽이고 목을 수 없이 베었으며, 그 말과 무기들을 모조리 빼앗았다. 그래서 원근이 진동하여 장수 관리들로 도망치고 숨어 엎드렸던 자들이 다투어 일어나 호응하니, 무리들이 7천 명에 이르렀으며, 적은 마침내 길주성으로 들어가 움츠리고 감히 발동하지 못했는데 길 옆에 복병을 두어 나오기만 하면 무찔러 버렸다. 이윽고 성진의 적이 임명(臨溟)을 크게 침략하므로 정예한 기병들을 이끌고 습격했으며, 산에 기대어 복병했다가 적이 돌아오기를 기다려 협공하여 크게 깨뜨리고, 또 수백 명을 목베니 마침내 그 배를 갈라 창자를 행길가에 늘어 놓자 군사의 형세가 크게 떨치고 적은 더욱 두려워하였다. 12월에 또 쌍포(雙浦)에서 싸웠는데 싸움이 한창 어울리자 편장(偏將)이 철기(鐵騎)를 끌고 가로 찌르기를 풍우같이 빨리 하니 적이 세력을 잃어 맞서 보지도 못하고 모두 흩어져 달아나므로 이긴 기세를 타고 또 깨뜨렸다. 이듬해 정월에 단천에서 싸웠는데, 세 번 싸워 세 번 이기고 돌아와, 길주에 진을 치고 군사들을 쉬게 하자, 청정이 불리함을 알고 큰 군대를 보내어 길주의 적을 맞아 돌아오게 하므로 우리 군사들은 그 뒤를 쳐서 백탑에 이르러 크게 싸워 또 깨드렸으며, 이 전쟁에서 이붕수(李鵬壽) 허대성(許大成) 이희당(李希唐)은 전사했으나, 적은 마침내 물러가 다시는 감히 북쪽으로 올라오지 못했다. 이때에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도 또한 소서행장을 평양에서 깨뜨렸는데, 정공이 최 배천을 시켜 샛길로 행재(行在)에 승첩을 아뢰니 임금이 불러보고 눈물을 흘리며, 붕수에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증직(贈職)하고, 배천에게는 조산대부(朝散大夫)의 계급을 내렸다. 그 때 관찰사 윤탁연(尹卓然)이 문부가 절도사에게 아뢰지 않았음을 성내며 의병의 공적이 자기보다 뛰어남을 시기하여 임금께 공로를 숨기고 거짓말로 아뢰었기 때문에 공에게는 포상이 시행되지 않았다. 오랜 뒤 현종 때에 관찰사 민정중(閔鼎重)과 북평사 이단하(李端夏)가 부로(父老)들에게 듣고 사실을 아뢰어 비로소 문부에게는 찬성(贊成), 붕수에게는 지평(持平)을 증직하고 남은 사람들에게도 차등 있게 관작을 내렸으며, 또 사당을 경성 어랑리(漁郞里)에 세워 당시 같이 일한 여러 사람들을 제사케 하고 창렬(彰烈)이라 사액했다. 지금 임금 경진년(庚辰年)에 창대(昌大)가 북평사가 되어 의병의 자손들과 함께 연고지를 방문하여, 사적을 자세히 얻어 개연히 제공의 기풍을 상상도 하고 또 이른바 임명(臨溟) 쌍포(雙浦)를 찾아 진치고 싸우던 자리를 거닐고 돌아보며 탄식하면서 떠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부로에게 말하되 "섬 오랑캐의 전화가 몹시 심하여 서울이 함락되고 팔도가 무너졌는데, 이분들은 죽음을 걸고 외로운 군사를 이끌고서 억센 도적을 무찔렀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발상한 옛 땅으로 하여금 마침내 오랑캐 땅이 되는 것을 면하게 했으며, 변방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일어나 충의를 서로 권하게 된 것이 그 또한 누구의 힘이더냐? 행주 연안에는 모두 비갈(碑碣)이 있어 사적을 적어 공렬을 나타내었으므로 동서로 오가는 이들이 우러러보고 몸을 굽히거니와 관북의 거룩한 공로를 가지고도 비갈 하나가 없으니 어찌 제군의 수치가 아니겠는가?"하니 모두 대답하되 "그렇소. 그것은 우리들의 뜻이기도 한데 하물며 공의 명령까지 있음이겠소"하며 마침내 돌을 다듬고 재물을 모으고 사람을 시켜 글을 청하였다. 나는 적임자가 아니므로 사양했더니 다시 와서 말하되 "이 일은 공이 실로 발의한 사람이니 허락해 주지 않으면 일을 철폐하겠소" 하므로, 나는 마침내 이 사적을 서술하고 새긴다. 숭정 갑신 뒤 65년(1709년 ) 10월 (최창대) 삼가 지음. 노산 이은상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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