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경기도

심곡서원, 정암 조광조의 개혁과 좌절

by Sage 역사인문여행전문가 2023. 10. 17.
반응형

1. 심곡서원에 배향된 정암과 학포선생

서울에서 멀지않은 경기도 용인시 수지에 가면 심곡서원이 있다. 서원은 사설교육기관(정부기관에서 설치한 것은 향교)으로서 성현에 대한 제사도 지내며 또한 지방유지들의 모임 공간이기도 했다. 심곡서원은 정암 조광조 선생과 학포 양팽손 선생을 배향하고 있다. 1650년(효종 1년)에 유림들의 뜻을 모아 정암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위패를 모셨었다. 이곳에 서원을 세우자는 논의가 일찍부터 있었는데 이는 선생의 무덤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한양조씨 조광조 일가의 선영이기 때문에 정암선생의 부모 형제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것을 볼 수있다. 초기에는 재원이 부족하여 포은 정몽주를 배향하는 충렬서원(용인시 모현면 소재)에 잠시 모셨다가, 심곡서원 건립 후 모셔오게 되었다. 충렬서원에 포은과 함께 잠시 배향된 인연은 우리나라 성리학 도통이 '포은 정몽주-->야은 길재-->강호 김숙자-->점필재 김종직-->한훤당 김굉필-->정암 조광조'로 이어졌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설립과 동시에 '심곡서원'이라는 사액(임금이 서원의 이름을 지어 그것을 새긴 편액을 내리던 일)을 받았고, 나중에 학포 양팽손을 함께 배향하였다. 학포 양팽손은 정암 조광조와 함께 과거에 합격하고 벼슬을 함께하며 학문을 토론하던 동지였다. 정암선생이 기묘사화로 실각하자 당시 임금인 중종에게 상소문을 올려 정암선생 등을 변호하였으나 이일로 삭탈관직되었다. 고향인 능주로 귀향하여 학포당이라는 작은 집을 짓고 독서로 소일하였기 때문에 호가 학포인 것이다. 특히 능주로 유배온 정암 조광조 선생과 매일 경론을 탐구하며 지내다가, 불행히 정암선생이 사약을 먹고 돌아가시자 어명을 어기고 시신을 수습하여 가매장하였으며 나중에는 용인 선영으로 묘를 이장해 주었다. 정암선생이 돌아가신 후로는 학포선생도 다시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심곡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존속하였고 개화기에는 학교로 쓰이기도 했다.

2. 정암 조광조, 도학정치의 나래를 펴다

정암 조광조 선생은 사림파의 정계진출을 확립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대사헌으로서 현량과를 처음 실시하여 소장학자들을 뽑아 요직에 채용, 추천하여 사림파가 중앙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양조씨는 태조 이성계의 함흥지방 군벌시절부터 함께한 개국공신 집안이므로 정암선생은 훈구파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사림파인 김굉필이 무오사화(1498년, 연산군 4년)로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마침 선생의 부친이 그곳에 벼슬을 하고 있어서 정암선생이 김굉필에게서 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이로써 정암선생은 사림파와 깊게 학연을 맻게 되고 사림으로 불리게 되었다. 정암선생은 중앙정계에 진출한 후 개혁정치를 시행하였다. 유학의 정통으로 돌아가 바른 정치를 실천하자는 것이 핵심요지였다. 스스로 유교의 가르침을 엄격히 실천하였고 관직에 오른 후에는 임금과 백성을 교화하여 유교적 이상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선생은 조선의 도학 및 실천유학의 시조로 추앙되었고 율곡이이를 비롯한 후대 학자들의 모범이 되었다. 비록 37세의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조선의 정치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부패하고 침체된 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열망하던 신진 사림들에게는 이념과 실천을 겸비한 개혁의 지도자였던 것이다. 신진적인 개혁정책(과거제, 향약실시,권력자의 토지 및 노비 몰수 등)이 국왕 중종의 적극적인 지원아래 추진되었던 것이다. 

3. 기묘한(?) 기묘사화로 좌절된 개혁

기묘사화는 1519년(중종 14년)에 중종과 훈구세력이 조광조 등 핵심세력을 몰아내여 죽이거나 유배보낸 사건이다. 사림파의 세력확장과 위훈삭제에 대한 불만이 주요 발생 이유였다. 위훈삭제란 중종반정(1506년,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왕으로 세운 사건)의 공신중에 공로가 과대평가된 거짓 녹훈자가 있음을 비판하고 결국 105명 공신 중에 76명을 공신훈적에서 깍아 버린 사건이다. 이는 중종반정으로 비대해진 훈구파 권신, 척신들의 전횡을 타파하고 강력한 왕권 확립을 위한 것으로 중종이 바라던 바였다. 사실, 중종이 이 훈구파를 다스리기 위해 신진 사림인 정암선생을 중용하여 개혁을 맡긴 것이었다. 그런데 중종은 훈구파대신에 사림파가 또 다른 세력으로 부상하는 것을 경계, 즉 정암선생 일파의 개혁을 배신한 것이 기묘사화의 핵심 원인인 것이다. 정암선생이 기묘년(1519년) 11월16일 옥에 갖혔고 화순 능성으로 떠났다가 동년 12월 20일에 사약을 받았으니 유배 한 달만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정암선생이 옥에서 중종을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하면서 하신 말씀에서 사건의 전말을 이해할 수 있다. '신은 뭇 사람과 뜻이 어긋나더라도 임금이 계신 것만 믿고 정책을 펴 왔습니다. 친히 심문하신다면 만 번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중종은 정암선생을 만나주지 않고서, '붕당을 만들고 국론과 조정을 어지렵혔다'는 죄목으로 단죄한다. 기묘사화는 중종의 배신이 주요원인이라 할 수있으나 신진 변혁주체세력이 대부분은 젊고 정치적 경륜도 일천하였다는 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급진적이고 다소 과격한 개혁추진은 노련한 훈구세력의 반발을 샀고, 조금이라도 생각이 다른 사람들 모두를 적으로 만듦으로써 반대세력이 많아진 것이었다. 정암선생 사후에 중종말년부터 조광조에 대한 재평가와 관직 복구요청이 지속적으로 이루어 진다. 선조 즉위한 그 해인 서기 1567년 4월에 기대승 등의 상소로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선조 3년에 문정이라는 시호가 주어졌고, 선조 38년에는 심곡서원터에 사우(신주를 모셔놓은 집)를 만들었다. 1650년 사액서원이 된 이후에 심곡서원은 충렬서원과 함께 기호유학(율곡 이이의 주기론을 주로 신봉한 성리학파, 노론의 핵심세력)을 이끄는 서인들의 본거지가 되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