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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덕진산성, 인조반정으로 노론주도 역사 출발지

by Sage 역사인문여행전문가 2023.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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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덕진산성은 전략적 요충지였다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어져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휴전선 부근에서 남쪽 땅을 바라볼 기회는 많지 않고 그러한 장소도 별로 없다. 그런데 덕진산성을 그것이 가능한 곳 중의 하나이다.더우기 민통선 안에 위치해 있어서 보통 사람들 접근이 수월하지 않은 관계로 자연 풍광이 잘 보존되어 있고 인적이 별로 없어 조용하며 현대적 시설물이 별로 없어 아주 편안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는 장소이다. 덕진산성은 민통선 안인 파주군 군내면에 위치해 있다. 이성은 연천의 은대리성, 호로고루성, 당초성과 함께 3국시대에 고구려가 쌓은 성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 미루어 이 지역은 신라, 백제, 고구려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다툰 지역일 것이다. 한국역사에서 한강을 중심으로한 중부지역을 차지하는 세력이 한반도 주인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보면 한강, 임진강, 한탄강 유역은 패권다툼의 중심지역이라도 할 수 있다. 지금도 남한과 북한이 마주한 군사 최전선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역사는 반복된다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든다. 덕진산성의 해발 65m의 낮은 언덕을 중심으로 산 허리를 돌아 내성과 외성으로 나누어 축조되었다. 비교적 낮은 곳에 위치해 있지만, 임진강 북쪽강안에 위치해 있고 주변에 높은 산이 없어 넓은 땅이 내려다 보이는 전략적 요충지로 판단된다. 남쪽으로는 저 멀리 서울 은평구까지 조망이 가능하였다. 성위에서 바라보면 임진강 안에 있는 유일한 섬인 초평도가 보이고, 강 건너편에 화석정이 보인다. 초평도는 서울 한강에 있는 여의도 면적의 2/3정도 넓이라 하고 남북분단 이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번화한 거리였다고 한다. 지금은 남북 접경지인 관계로 목함지뢰가 많아서 위험한 관계로 활용을 할 수 없는 땅이 되었다. 화석정은 임진왜란(1592년)때 선조 피난길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이다. 화석정앞 안내판 설명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율곡선생은 인진나루에 있는 화석정을 틈날때마다 들기름 뭍힌 걸레로 정자마루와 기둥을 닦도록 하였고 임종때는 "어려움이 닥치면 열어보라"하며 밀봉한 편지를 남겼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임금이 의주로 피난가게 되었는데 그날 이곳에 폭퐁우가 심해 한치 앞을 볼수 없는 어려움에 처했다.  이때 이항복이 율곡의 밀봉편지를 열어보니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고 쓰여 있었다. 기름을 잘 먹은 화석정에 불을 지르자 대낮같이 밝아져서 선조일행이 무사히 강을 건널수 있었다.

 

이로 미루어 임진나루터-화석정-초평도 길은 평양 및 의주로 통하는 국가 주요간선도로였음을 짐직할 수있다. 그러니 이곳을 내려다보며 감시할 수 있는 덕진산성은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2. 인조반정 주력군의 본거지 였다

덕진산성은 인조반정(...선조-광해군-인조...)때 반군의 주력부대가 본거지로 사용한 곳이다. 인조반정은 서인세력이 남인 일부세력과 손잡고 광해군을 몰아내고 임금을 인조로 바꾼 쿠데타이다. 선조임금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붕당을 초월하여 정치를 하려 하였고, 당시 중국의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실리를 취하는 중립외교 정책을 폈다. 서인들은 광해군이 왕위 정통성을 다투는 과정에서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어머니뻘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사건을 명분으로 하여 반란을 일으켜 성공시킨다. 폐모살제(廢母殺第)의 폐륜행위는 서인세력에게 좋은 명분이 되었고, 신경진과 김류를 중심으로 반정모의가 시작되어 장단부사 이서, 평산부사 이귀 등이 덕진산성에서 훈련시킨 반군 주력군을 이끌고 창덕궁으로 처들어가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을 왕으로 옹립하여 서인이 정권을 잡은 것이다. 또한 서인들의 편협한 국제외교 시각은 조선에 전쟁을 초래하여 백성들의 삶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서인들은 지나치게 명분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광해군이 추진한 명.청 중립외교도 비판하여 대안도 구체적 전략도 없이 친명배금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는 세력이 망해가는 명나라와 친하고 새로 불처럼 세력을 키우고 있는 청나라와 적으로서 싸우자는 정책이라서, 향후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의 참화, 측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명분을 주게 되었다. 청나라가 침임한 병자호란때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가 결국 청나라에 항복하는 굴욕을 당한다. 인조반정의 주력군 대장의 한 명인 장단부사 이서의 부인은 인조반정 당일날 덕진산성에서 임진강으로 투신하여 자살했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남편의 쿠데타 성공소식을 기다리다가 쿠데타가 실패한 것으로 잘못 알았다는 것이다. 이로서 이서 장군의 부인은 청나라 침략의 굴욕을 겪지 않게 된 것인데 잘된 일일까?

3.  반정이후 조선은 노론의 세상이 됐다

조선역사에서 일어난 쿠데타중에서 인조반정처럼 반대파를 철저하게 주살한 적이 없다.  조선의 붕당은 선조때 중앙실권을 장악한 사림파가 동인과 서인으로 분파되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1575년). 붕당정치는 정치적인 견해를 중심으로 정치집단이 구분된 것이 아니라 지연, 학연 및 이해관계에 따라 무리가 나눠졌으므로 붕당정치라고 하는데 공론에 입각한 상호 비판과 견제를 통해 균형과 공존을 이룬다는 점에서는 현대 정당정치와 유사성이 있다. 조선중기까지는 특정 가문의 권세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막는 순기능을 하였으나, 조선후기에는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이 반대파를 숙청한 이후에는 오로지 자기 붕당의 정권유지와 세력화를 위해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건의 배경에는 왕위의 정통성 다툼을 명분으로 하였으나 실은 자기 붕당의 세력화 기회로 활용하고자 하는 각당의 이해관계가 조선 후반기는 당파싸움의 주요원인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당파싸움, 보수화된 정권은 국제정세변화에 제대로 대처할 능력을 상실케하여 조선이 자주적으로 근대화할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그런점에서 대표적으로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을 북벌론의 경직된 사고, 지나친 주자학 원칙론으로 다양한 사고 및 산업발전에 저해되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비판하는 학자들이 많다. 인조반정 성공 후에 서인의 정권주도세력들은  동인 등 정치 반대세력을 완전 숙청시킴으로서 인조이후 조선 후기에 서인계열의 노론이 오로지 정치를 장악하는 편협한 보수정권이 장기집권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결국, 덕진산성에서 시작된 인조반정은 조선을 보수화시켜 나라의 발전을 지연시킨 역사적으로 불행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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