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 성곽은 일본이나 유럽과 다르다
동양에서 말하는 성과 외국에서 말하는 성은 개념이 좀 다르다. 성이 공격을 받을 때 방어기능을 하는 것은 기본적 기능이지만, 한양도성은 도시를 둘러싸고 한양과 그 나머지 지역을 구분하는 경계 역할을 주로 한다. 반면에 서양이나 일본의 성은 성주나 영주가 거처하는 호화로운 저택으로서 침략시 방어에 유리하도록 지리적으로 높은 지역에 건설하거나 성 주변에 해자를 둬서 방어적 역할을 할 뿐이지 경계로서의 역할은 없다. 대표적으로 일본의 오오사카의 히메지성이나 독일의 노인슈반스타인성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성을 외부침략에 대한 방어시설 측면에서 보면, 조선의 성곽은 성안의 모든 백성들과 함께 살자는 것이고, 서양의 성은 평소에는 권위를 상징하고 전시에는 성주나 영주의 안위를 최우선적으로 한다. 기본적으로 이러한 생각의 차이가 성곽의 구성과 형태를 다르게 만든다. 한국의 성곽과 외국의 성곽은 둘 다 방어용 구조물이지만 디자인 건축, 역사적 맥락에서도 몇 가지 차이점을 보인다. 한국 성곽은 일반적으로 돌담, 목조 구조물, 복잡한 디자인의 곡선형 지붕이 특징인 독특한 양식이 특징이다. 유럽의 성은 높고 정사각형의 탑과 뾰족한 성벽이 인상적인 석조 요새로 유명하며, 일본의 성은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목조 성곽으로 유명하다. 한국 성곽은 주로 석재와 목재를 사용하여 복원력이 뛰어나지만 화재에 취약하다. 이러한 재료의 조합은 건축시 유연성과 현장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 위주의 건축을 가능하게 한다. 외국 성은 공격에 대한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채석과 운반에 노동력이 많이 드는 석재에 크게 의존한다. 따라서 구조물의 내구성은 높지만 설계의 유연성이 제한된다. 한국 성곽은 언덕이나 산에 전략적으로 배치하고, 성벽을 여러 겹으로 쌓고, 성곽 안에 복잡한 미로를 만들어 침입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등 자연 방어에 중점을 둔다. 또한 궁수를 위한 화살구멍과 망루와 같은 기능도 통합되어 있다. 외국 성은 높은 성벽, 해자, 도개교, 요새화된 성문이 특징이다.이러한 성은 장기간의 포위 공격과 직접적인 공격을 견디는 데 중점을 두고 설계되었으며, 성채 내부의 중앙 집중식 방어에 중점을 둔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화성이나 경복궁과 같은 한국의 성곽은 왕조 시대에 지어졌다. 유럽의 성은 주로 중세 시대에 봉건 영주와 군주를 위해 지어졌다. 한국의 성곽은 한국의 유산과 문화적 정체성을 상징한다. 외국 성곽도 봉건제도, 기사도, 중세 전쟁과 관련된 중요한 역사적, 건축적 랜드마크이다.
2. 화성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축성했다
우리나라의 성곽 건축방식을 고려할 때 수원 화성은 매우 특이한 존재라고 할 수있다. 조선 후반기에 전쟁양상이 많이 달라진 상황에서 건설된 성곽이기 때문이다. 규모는 약 5.74킬로미터(약 3.57마일) 길이에 높이 4~6미터(13~20피트) 돌담이 특징이다. 요새, 포탑, 성문, 화살탑 등 다양한 방어 구조물로 구성되어 있고, 성벽은 총기와 전통 무기의 공격을 모두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조선왕조 제 22대 임금인 정조(재위1776년-1800년)의 통치 시기에 1794년부터 1796년까지 건설되었다. 건설 배경은 몇 가지 주요한 측면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수원 화성은 정조가 만든 소위 계획도시이고 신도시이다. 당초 정조대왕이 비극적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건설이 시작되었지만 당시 지역경제에 큰 도움이 되었다. 화성호(花城湖)라는 인공호수도 정조가 성곽 건설을 계획할 때 만들어진 것으로 아름다운 '수원화성행궁' 풍광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농업용수로 써서 백성의 삶을 풍족하게 위해 만들었다. 이처럼 경제적으로 수원화성 건설은 지역 경제에 큰 도움이 되었다. 많은 노동자와 기술자가 참여한 건설 프로젝트가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키고 수원의 발전을 촉진한 것이었다.수원화성은 외부 침입으로부터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건설되었기 때문에 성곽 고층은 석축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화성포(花城砲)와 같은 최신의 방어무기가 도입되었다. 수원화성은 조선시대 건축 기술과 조선왕조의 문화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건축물로서, 현재는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되어 보존 및 보수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전쟁 등 전란을 겪으면서 상당부분 파괴되었으나 건축당시의 상세한 설계도(화성성역의궤)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어서 그대로 복원할 수 있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방문객들은 18세기 후반의 모습 그대로의 성곽을 체험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UNESCO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되어 세계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유적지로 인정받고 있다.
3. 정조의 개혁은 미완성
조선 22대왕 정조(1752~1800)는 재위기간(1776~1800) 동안 다양하면서도 중요한 개혁을 시행했다. 진보적인 사고로 유명했으며 화성 성곽 설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도시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통치의 안정과 번영의 상징이 될 수 있는 요새를 만들고자 했고, 기능적인 목적을 유지하면서도 미적으로도 아름다울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그는 유교적 계몽절대군주라고 할 수 있다. 우선, 당시 극심했던 당파싸움을 극복하기 위해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오랫동안 갈등을 빚어온 노론과 소론의 정치 세력을 화해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정조는 두 당파 간의 세력 균형을 맞춰, 보다 안정적인 정치 환경을 조성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농업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북학을 장려하여 상업활동과 무역을 지원하여 경제를 활성화하여 국가 번영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개혁노력은 기득권 세력의 반대에 부딛쳐 상당한 좌절에 직면해야 했다. 처음에 정조를 지지했던 노론 세력이 나중에는 정조의 개혁에 반대하여 정치적 불안정과 저항을 초래했다. 49세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도 반대파에 독살당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고 지금도 그렇게 믿는 사람들도 많다. 정조 사후에 탕평책, 초계문신제, 상업의 장려, 규장각 설치, 조세제도 개혁 등이 발전적으로 계승되지 못했고, 정치적 실권도 안동김씨 일파에게 넘어가서 세도정치의 암흑시대가 도래한 것은 우리 역사에 매우 아픈 구석이다. 우리나라가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정체하고 있는 동안, 서양은 산업혁명을 통한 급격한 발전을 이룩하였고, 일본은 근대화의 기초를 착실하게 닦은데 비해, 우리나라는 자주적 근대화 기회를 상실한 것이다. 정조대왕이 좀 더 오래살아서 강력한 개혁정치를 계속했더라면, 조선말 혼란기와 일제 강점기를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정조는 건능에 묻혀서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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