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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장준하 공원, 독립과 민주화 투사의 허망한 최후

by Sage 역사인문여행전문가 2023.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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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준하 공원과 묘지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성동리에 가면 '장준하 공원'이 있다.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가까운 곳이라서 그 곳을 관광하고 잠시 들르기 좋은 곳에 위치해 있다. 공원이라고 해도 그리 넓지는 않은 소공원이다. 잔디밭이 아담하게 조성되어 있고 조형물에는 장준하 선생의 일대기가 기록되어 있다. 조형물 뒷 쪽 산길을 조금 올라가면 장준하 선생 묘소가 있다. 묘소는 조그마한 돌로 만들어져 있고 묘소 주위에는 기념물들이 서있는데 여기에는 장준하 선생이 쓴 글들이 새겨져 있다. 특히, 사상계라는 잡지에 기고하신 글이 선생의 필적으로 새겨져 있는 기념물이 있어서 읽어보니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자손만대에 누를 끼치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지성일관 용왕매진하자'라고 써 있었다. 장준하 선생의 묘소 모습은 자신의 자서전 제목인 '돌베개' 비슷하였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묘소에도 작은 넙적돌하나 놓여있는 모습이었는데,  장준하 선생 묘소의 돌이 노무현 대통령 묘소 돌보다 크기는 좀 더 크다는 느낌이었다. 마치 우리나라 선사시대의 기반식(바둑판식) 고인돌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원래는 광탄면의 나사렛 묘지에 묻히셨는데 2012년 8월에 이곳에 공원을 조성하고 이장하였다고 한다.

2. 일본 학도병 탈출하여 독립군에 입대

1918년 출생하셨고 1975년 8월 17일 별세하셨다. 독립운동가, 정치가, 언론인, 사회운동가, 종교인이셨다. 장준하 선생의 아버지 장석인(1901~1966)도 독립운동가이며 목사셨다. 장석인은 민주화 운동가로 유명하며 씨알의 소리라는 잡지로 유명한 함석헌 선생과 동갑이고 함석헌의 장남 함국용은 장준하선생과 같은 1918년 생이므로 이들의 동지애는 남달랐을 것으로 생각된다. 장준하 선생은 세계2차대전 말기인 1944년 일본신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끌려 갔다가, 6개월만에 탈출하여 독립군에 입대하게 된다. 광복군에 합류하기 위해 평생의 친구였던 김준엽 등과 함께 2,500KM를 약 7개월 동안 걸어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중경까지 갔다. 도중에 검문에 걸리지 않기 위해 중국 농부나 상인으로 변장하기도 하였다. 탈출 성공 직후에는 중국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 한국광복군 간부 훈련반에 입대한다. 그러나 이곳 훈련의 한계를 느끼고 1945년 1월 30일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가게 되었다. 도착 후 서안의 한국광복군 제2지대 이범석 휘하에 배속되고, 유엔군 중국전구 사령부 웨드마이어 휘하에서 미국전략정보국이 주관하는 한미합작 특별군사훈련(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을 받았다. 한국 후방 침투를 목적으로 조직된 국내정진군에 자원하여 수송기를 타고 작전에 투입되었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귀환하였다. 그후 1945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비서 자격으로 귀국하였다. 1946년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하였고, 1953년에는 사상계라는 잡지를 창간하였다. 사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3. 독립과 민주화운동가의 허망한 최후

장준하 선생은 1961년 516군사정변이후 민주화 투쟁에 나서 여러차례 투옥되기도 했다. 그가 만든 '사상계'는 군사독재시설에 참 지성으로 존경받던 월간지였다. 그는 1967년 동대문에서 제 7대 국회의원 당선되어 정치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1972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유신체제를 수립하게 된다. 장준하 선생은 유신체제 반대운동을 주도하는데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에 있는 약사봉을 등산하다가 의문의 등산사고로 사망하였다. 유신정권의 엄중한 상황속에서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본부 이름으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발표한 그 해에 의문사 한 것이다. '민주헌법을 만들고, 자유언론을 보장하라'. 유신정권에 대한 장준하 선생의 요구는 지금 시각으로 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장준하 선생같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덕분에 우리나라가 독립할 수 있었고, 민주화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덕분으로 자유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장준하 선생 사망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사인에 대한 의문점이 제기 되었으나 제대로 규명되지는 않았었다. 마지막 조사는  2012년에 이루어 졌다. 장준하 공원묘지 조성을 위해 묘지를 이장할 때 유골검사를 하였는데 머리에서 가격흔적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곳에는 골절된 흔적이 없으므로 타살가능성에 무게가 더 실렸으며 2013년 진상조사위원회에서 '타살후 추락'으로 결론내렸다. 장준하 선생의 신학교 졸업, 군 장교출신 등 경력을 감안하면 진보주의자라기 보다는 민족주의자이며 보수주의에 가까운 듯하다. 해방후 1970년대까지 군부독재에 맞서 싸운 선생의 이력으로 인해 장준하 선생의 역량이나 조국에 대한 기여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 같아 쓸쓸한 마음이 드는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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