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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용주사, 융능 조성으로 부모은중경 모범 보인 정조

by Sage 역사인문여행전문가 2023.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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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용주사는 융능 능침사찰이다

용주사는 수원화성에 위치한 융능과 건능(사도세자와 정조의 능) 능침관리사찰로서 조선 22대 정조의 명으로 중창되었다. 이곳에는 신라시대때부터 갈양사라는 절이 있었으나 병자호란때 소실되어 없어졌었는데, 정조가 자기 아버지 능을 현 위치로 옮긴 후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위해 건립한 것이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 능은 양주 배봉산(현재 서울 전농동)에 있었으나 왕이 된 후 천하 명당이라는 수원 화산으로 이장한 것이다. 교조화된 골수 성리학이 맹위를 한참 떨치던 조선왕조라서 아무리 국왕이라도 정조가 불교 사찰을 건설한다고 했을 때는 당시 유학자들과 신하들의 반대가 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정조는 효를 실천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걸었을 것이다. 아마도 유교에서는 효행을 으뜸으로 치고 널리 장려해야 하니까 누구도 반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정조는 직접 이 절을 설계하고 건물의 이름을 명명하였다. 그래서 용주사는 다른 사찰과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우선 용주사에 들어서면 어느 양반집에 들어가는 느낌이 들고 정갈하게 좌우대칭으로 잘 짜여진 건물배치가 인상적이다. 대웅전 자리가 마치 경복궁 근정전 같은 느낌도 든다. 절 이름은 정조가 낙성식날 저녁에 용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고 해서 용주사로 명명하였다. 또한, 대웅보전 현판 글씨는 정조대왕이 직접 쓴 친필이라 한다.

2. 불설대부모은중경의 실천

효도를 위해 중창한 사찰답게 불교경전의 하나인 '불설대부모은중경'이 용주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불경을 정조에게 소개하여 정조의 마음을 크게 움직인 스님은 보일당 보일스님이었고 한다. 전라도 장흥 가지산 보림사 출신이었던 보일스님은 정조에게 부모은중경의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하여 주었다. 정조는 보일스님이 들려준 부모은중경의 내용에 깊은 감명을 받아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고 그 주변에 폐사된 갈양사터에 절을 새로 중창하여 용주사라 이름 붙여서 사도세자 묘의 능침사찰로 삼았다는 것이다. 용주사 경내의 호성전 앞에는 이 불경을 새겨놓은 탑이 있고, 사천왕상 부근에는 효행박물관이 있는데, 특히 박물관 주요 전시물 중에 대표적인 문화재로 <불설대보부모은중경판(佛說大報父母恩重經版)>이 있다. 이 불경은 부처님께서 가르켜주신 것으로서 '부모님의 은혜의 귀중함과 그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 것인가?'를 주요 내용으로 하고있다. 이 경판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목판 42판, 동판 7판, 석판 24판 등 모두 73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목판은11매는 한문판, 25매는 한글판, 변상도 6매이고 양면에 양각되어 있다. 석판 24매도 한문판과 한글판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한문을 모르는 일반 백성이라도 이해하기 쉽도록 그 내용을 한글과 그림으로 제작한 정조의 세심한 배려가 잘 나타난다.

3. 융능조성으로 정조 정통성 강화하다

조선왕조실록(sillok.history.go.kr참조)을 살펴보면 융능 조성 및 수원 화성 건설 배경을 자세하게 알수 있다. 정조 13년(1789년) 7월11일 기사에는 정조의 고모(사도세자의 누이)인 화평옹주의 남편인 '금성위 박명원'이 '사도세자가 묻혀있는 영우원의 묘역이 비좁고 초라하기 때문에 서둘러 이장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다. 당일날 바로 2품 이상의 대신들을 소집하여 이 문제를 공론화시키고 이장지를 결정한 후 이장 및 주민이주를 담당할 조직( '천원도감'과 '원소도감')까지 설치한다. 또한, 외규장각에서 영능과 장능 천장 의궤를 가져오게 하여 선례를 조사하고 '비용 을 어떻게 쓸것인가?'까지 자세하게 지시한다. 심지어 7월 13일에는 영의정 김익, 좌의정 이성원, 우의정 채제공 등이 수원 화산(현 융능위치) 현장을 시찰하고 돌아와 안장 방법에 대해 정조에게 보고를 올린다. 이렇게 정조가 신속하게 사도세자의 묘 이장을 국가의 주요대사로 채택하고 실행하게 된 배경에는 권력노선 투쟁, 그리고 영우원 이장을 사전 포석으로 삼아 화성 신도시 건설이 있다. 첫째, 정조는 이장사업을 통해 부친 사도세자에 대한 복권을 단행하면서 자신의 왕권에 대한 정통성 강화를 꾀하였다. 둘째, 자신의 개혁사업을 배후에서 뒷받침해 줄 정치, 군사, 경제적인 거점 신도시를 건설하였다. 수원 팔달산 아래 화성 신도시를 속전속결로 빈틈없이 건설함으로써 수구적인 노론 세력이 대부분 장악하고 있는 한양 의존 일변도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융능 조성의 숨은 배경에는 조상 묘자리가 좋지않아 정조를 계승할 왕자가 태어나지 못한다는 풍수사상도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정조는 1782년(정조 6년)에 의빈성씨(宜嬪 成氏)에게 첫째 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를 얻었으나, 문효세자가 5세의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았고 융능을 조성하기 전에는 아들이 없었다. 융능 조성 직후인 1790년(정조 11년)에 수빈박씨(綏嬪 朴氏)에게 둘째 아들 순조를 얻었으니 풍수사상이 실제로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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