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한산성은 가장 가까운 피난처다
서울의 남쪽 송파구와 경기도 성남시, 하남시 방면에서 출발하여 남한산성을 등산할 수있다. 버스나 승용차를 이용하여 산성의 중심부까지 접근할 수도 있으나 등산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도 약 1시간 쉬엄쉬엄 오르다보면 정상에 도달하게 되는 그리 어렵지 않는 등산코스이다. 따라서 수도권의 많은 주민들로부터 큰 사랑받는 관광코스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남한산성은 조선시대에 축성되었지만 이 자리에는 백제의 건국한 온조의 왕성이었다는 기록도 있고 신라시대 문무왕 때 주장성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삼국시대부터 이곳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새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강남쪽에서 한강과 서울을 조망할 수있는 험준한 산악지역 요지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한강중류지역을 차지함으로써 한반도의 주인이 주인이 되고자 경쟁하는 세력들에게 이곳은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남한산성은 현재 대한민국 수도 서울 중심부에서 약 25km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산성의 둘레는 12km정도이다. 산성내부에 작은 도시를 이룰만큼 넓은 분지가 있기 때문에 평시에 백성이 살고 있으면서 유사시에는 국왕을 비롯한 정권 핵심세력이 대피할 수 있도록 조성한 성곽이었다. 남한산성은 동서남북에 4개의 문과 문루, 16개의 암문, 4개의 장대가 있었고 성안에 수어청을 두고 관아와 창고, 행궁을 두었다. 행궁은 모두 252칸이었고,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샘이 있는 등 많은 인원이 생활할 수 있도록 했다. 지금은 남아 있는 건물이 몇 안되지만 4대문과 수어장대 등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사적이며 도립공원이면서 2019년에는 세계분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 병자호란때 급하게 피난 입성했다
남한산성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매우 치욕의 현장이다. 병자호란은 음력 1636년(인조 14년) 12월 8일부터 다음해 1월 30일까지(양력 1636.1.3~2.24일)까지 벌어진 중국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다. 병자호란전에 청나라의 1차 침입인 정묘호란(1627년)이 있었는데 이 때 조선은 청나라(당시는 후금)와 형제의 맹약을 하고 여러가지 약속을 하였었는데, 조선을 그 약속을 잘 지키지 못하였다. 세력이 더 커진 청나라는 재침을 하였는데, 병자호란때는 전략을 더 세밀하게 수립하여 시행한다. 조선 조정이 강화도에 피란하여 장기전을 하게 되는 경우에 중국 본토의 명나라와 전쟁이 한창이던 청나라로서는 조선침략을 속전속결해야하는 처지였다. 그래서 선봉대는 중간의 모든 성들을 무시하고 무조건 서울로 달린다. 1636년 12월 6일 압록강을 건넌 선봉대는 10일만에 서울에 당도한 것이다. 이렇게 빨리 처들어 올것을 예상못한 조선조정은 강화도로 피난할 여유가 없어 가까운 남한산성으로 급히 피난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2월 14일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으나 성안에는 겨우 50일 견딜수 있는 군량미만 준비되어 있었다. 청나라 선봉대는 12월 16일 남한산성에 이르렀고 다음해 1월1일에 청태종의 본대는 20만군사로 남한산성을 포위한다. 조선군은 상령전투, 광교산전투 등에서 패하고 다른 지역 전투에서 큰 성과가 없었다. 결국 남한산성을 구원하기 위해 오던 근왕병, 의병 및 승병 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한산성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강화도까지 청군에 함락되자 남한산성에서는 청군과 항복조건을 협상하여 1월 31일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에서 성하(城下)의 맹(盟)의 예를 행하여 청태종에게 항복하게 되었다. 항복조건은 첫째, 조선과 청나라는 군신관계를 맻는다. 둘째, 명나라와 사대관계를 청산한다. 셋째, 조선의 세자와 차자 등을 청나라에 볼모로 보낸다. 넷째, 청이 명나라를 정벌할 때 조선은 군대를 파견한다. 다섯째, 모문룡의 가도를 공격할 때 조선는 배 50척을 보낸다. 여섯째, 명나라에 조공한 것처럼 청나라에도 조공한다 등 11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는 '조선은 새로 성을 쌓거나 옛 성을 보수하지 말 것'이라는 조항도 포함되어 있다. 조선의 저항능력을 철저히 말살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 할 것이다.
3. 역사는 반복되어서는 않된다
필자의 지식으로는 우리나라 역사상 국왕이 외국에 항복한 사례는 조선왕 인조가 유일하다. 조선은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약 45년 전에 임진왜란, 즉 일본의 침공을 받아 조선백성들이 7년동안 전쟁을 치뤄야 했다. 전쟁의 상흔이 다 치료되기 전에 다시 전화에 휩싸인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더욱 국력이 쇄락해진 명나라와 신흥 세력이었던 여진족 만주의 청나라 사이에서 광해군은 중립외교로 조선의 국가이익을 간신히 지켜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보수세력이라 할 수 있는 서인세력은 인조반정을 통해 광해군을 내쫓고 인조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였다. 인조반정이후 집권세력은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해 준 은혜를 저버릴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청을 버리고 명나라와 외교를 강화하게 된다. 어찌보면 신흥세력과 적대관계를 형성함으로써 국가가 다시 전란에 휩싸이게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명청교체기의 조선의 처지를 21세기 중국과 미국사이에서 국가이익을 지켜야 하는 대한민국의 처지와 비유하는 세간의 담론을 보면 역사는 반복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명나라는 미국, 청나라는 중국이라고 한다면 미국이 매우 서운해 할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같은 큰 전란을 겪고서도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하지 않았고 그 이후로도 250년 이상 지속된 것이 우리나라의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이러한 큰 일을 당하면 그 모순을 잉태한 세력이나 체계는 파괴되고 그 모순을 극복한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여야 한다. 그러나 조선은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세력이 반대파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더욱더 보수화되어, 당파싸움, 척화정치를 지속하였고, 조선은 결국 자주적인 근대화, 산업화의 기회를 상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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