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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하서 김인후의 강학당 훈몽재(訓蒙齋)

by Sage 역사인문여행전문가 2024.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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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몽재 전경

1. 순창에 있는 훈몽재(訓蒙齋)

전북특별자치도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에 가면 "훈몽재"라는 유적이 있다. 정읍 내장산 국립공원에서 지척이다. 호남고속도로 정읍 IC를 빠져나와 국도 21번에서 순창군 쌍치면 시산리와 중안리 중간도로를 따라 둔전리로 가면 백방산 자락 아래 추령천변에 위치해 있다. 정읍 IC에서 자동차로 약 30분 소요된다.

훈몽재 의미는 '어리섞음을 가르쳐 일깨우는 집'이라는 뜻이니 후학을 양성하는 강학당인 것이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1548(명종3)년에 자신의 처가집 고향마을에 지었다.

 

2. 조선 중기 문신 하서 김인후의 강학당 

김인후는 1510(중종5)년에 전라도 장성에서 태어났다. 18살에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21살에 사마시(주석1)에 합격하였다. 23살때부터 퇴계 이황과 함께 성균관에서 학문을 닦았고 30세인 1540년에 별시 문과(주석2)에 급제하였다. 1543년에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가 된다. 즉 훗날 인종이 되는 세자를 보필하고 가르치는 직임을 맡은 것이다. 세자와는 5살 차이였지만 두 사람은 세자와 스승 이상의 절친이 되었다. 1544년에 중종이 승하하자 뒤를 이은 인종을 보필하였는데, 인종이 1545년 7월에 갑자기 승하하게 된다. 곧 이어 을사사화(주석3)가 일어나자 김인후는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처가집 마을인 이곳으로 낙향하여 강학당을 연 것이다.

주석 1) 생원시와 진사시를 합하여 부를 때 사마시(司馬試) 또는 소과(小科)라고 하였다. 사마시는 3년마다 정기적으로 설행하는 식년시와 국가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축하하기 위하여 실시하는 증광시로 구분되었다. 식년 사마시와 증광 사마시는 시행 시기만 다를 뿐 시험의 절차와 내용은 같았다.

 

주석 2) 別試는 국왕의 즉위 이외의 국가의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는 특별시험이었다. 별시 문과는 초시와 전시 두 단계만 있었다. 이 때의 초시는 식년 문과의 복시에 해당한다. 별시 문과는 서울에서만 실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주석 3) 1545년(명종 즉위년)조선 왕실의 외척인 대윤(大尹)윤임과 소윤(小尹) 윤원형의 반목으로 일어난 사림(士林)의 화옥(禍獄)으로 소윤이 대윤을 몰아낸 사건

 

3. 인종의 스승이자 친구

인종은 6살 때인 1520년(중종 15년) 책봉된 이후 세자 신분으로만 25년간이나 살았다. 인종은 친모인 장경왕후(1491~1515)가 산후증으로 7일만에 승하하면서 새어머니인 문정왕후(1501~1565)가 생긴다.하지만 문정왕후에게도 아들(경원대군, 훗날 명종)이 있었으므로 그녀는 자기가 낳은 아들을 옥좌에 올려놓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성군의 자질을 물씬 풍겨 성군이 될 것이라는 신망을 받았고 영특하였지만 25년 세자 생활은 날마다 위태로웠다.

 

인종의 성덕은 채 피지도 못한채하고 8개월 단명으로 끝난다. 인종의 사인은 공식적으로는 지나친 효도 때문에 얻은 병으로 알려져 있다.1544년(중종 39년) 중종이 병에 걸리자 세자(인종)는 부왕 곁을 지키면서 밤낮으로 관과 띠를 풀지 않았고, 곡기까지 끊었다. 이런 지극정성에도 아버지 중종이 승하하자(1544년 11월 15일) 인종은 머리를 풀고 뜰 밑에 엎드려 엿새 동안이나 물 한모금 입에 대지 않았다. 

 

인종은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문정왕후와 왕후의 오라비인 윤원로(?~1547), 윤원형(?~1565) 형제가 인종을 해코지 하려고 갖은 술수를 썼다. 특히 윤원형 등은 일찍이 절에 불공을 올려 임금의 수명이 길지않게 해달라고 하고, 한밤중에 남산에서 임금이 빨리 죽게 해달라는 등 참담한 기도를 해댔다. 궁중에 나무로 만든 사람을 묻어서 요망한 방술을 했다. 1543년(중종 38년) 1월7일에는 세자가 기거하는 동궁에서 대형화재가 발생했는데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다. 인종의 스승이자 절친인 김인후도 당연히 이런 수상한 기미를 감지했다. 부모 공양을 위해 옥과 현감으로 나가있던 김인후는 1545년(인종 1년) 4월 인종의 상태가 나빠지고 있었던 때에 상경한다. 김인후는 스승의 자격을 내세워 약제의 처방을 의논하는 자리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으나 담당책무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한다. 마지막 부탁으로 전하를 제발 다른 궁궐로 옮겨 건강을 돌봐야 한다고 신신당부했지만 이마저 허용되지 않았다. 

 

4. 매년 인종 기일무렵 미치광이가 되는 하서

1560년(명종 16년) 1월16일 명종실록이 기록한 하서 김인후(1510~1560)의 졸기(부음기사)에는 "타고난 성품이 맑고 순수했다. 5~6세 때에 문자를 이해하여 사람을 놀라게 했고, 용모만 바라보면 속세 사람같지 않았다. 마음이 관대하여 남들과 다투지 아니했으며, 예의와 법도를 실천했다."고 되어 있다.

 

김인후는 유언으로 "(내가 죽은 뒤) 옥과(전남 곡성)현감 이후의 관직은 쓰지 말아달라" 고 했다. 옥과현감을 지낸 뒤에도 명종 시대에 성균관 전적(정6품), 홍문관 교리(정 5품)와 성균관 직강(정 5품) 등의 관직을 명받았으나 그런 직함은 절대 쓰지 말아달라는 유언을 남긴 것에는 그 이유가 있었다고 할 수있다. 문정왕후와 문정왕후의 오라비인 윤원형의 애첩 정난정(?~1565) 등 국정문란 세력이 주는 부끄러운 관직을 절대 받지 않았다는 결기의 표현인 것이다.

 

하서 김인후는 매년 6월 그믐~7월 그믐 사이 인종의 기일(제삿날) 무렵이 되면 뒷산에 올라가 며칠 밤낮 통음하면서 미치광이처럼 대성통곡하다고 돌아왔다.

 

5. 선비의 길에서

훈몽재에서 가인 김병로 선생 생가(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까지 추령천변을 따라 약 6km 잔교 산책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수량이 많은 냇가를 따라 걸으면서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를 듣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국정농단을 이유로 대통령을 탄핵시키기도 했던 대한민국이다. 그래도 오늘날 우리는 투표라는 평화로운 방법으로 민의를 관철할 수 있으니 우리는 행복한 것 아닐까?

 

[참고 영상]

https://youtu.be/QReXM4Vbj78?si=i3JI5R1bCjtf9pui

 

https://www.instagram.com/reel/C4nECOWO4kp/?igsh=YmY2OGF2bnRzcTZ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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