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방호족세력의 협조로 건국한 고려
고려거란전쟁을 보면 피난을 가는 현종에게 지방호족이 무례하게 행동하는 장면이 나온다.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고 심지어 반역까지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지방호족들이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지방호족 자신들의 경제적 토대를 지키기 위해 더 확장하기 위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지방호족들을 이해하려면 당시의 토지제도와 국가 장악력을 파악해 보는 것이 좋겠다.
신라를 무너뜨리고 후삼국을 거쳐 고려를 건국하는 과정에서 왕건은 결혼정책을 적극실행한다. 각 지방호족들의 협조를 적극적으로 얻기 위해서 인척관계를 맺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왕조를 창건한 이후에는 왕족 수를 늘이지 않기 위해 친족간 결혼이 성행한다. 그래서 고려 초기의 족보는 오늘날 시각으로 보면 비윤리적이고 난해하다. 또하나, 건국시 협조했던 호족세력이 강하면 왕권이 취약해지므로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노비안검법', '과거제도' 등을 시행한다. 역사는 돌고돌며, 모순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이다.
2. 녹봉이나 식읍
예나 지금이나 일을 하게되면 댓가(월급, 녹봉 등)를 받아야 하는데, 이것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알면 많은 역사적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선 중국의 봉건제도를 보자. 황제가 왕조를 새로 창립하고 나서 어느지역을 뚝 떼서 공신이나 친인척을 그 곳 왕으로 봉하면서, 외교권과 군사권을 제외한 권리를 모두 부여하는 것이 봉건제도다. 이렇게 하면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처음에는 왕조 창업에 기여한 공신이나 친인척이 왕에 봉해지니까 끈끈한 인간관계와 분봉해준 은혜에 고마움을 깊이 간직하겠지만, 그 자리를 세습한 후손 왕들은 이러한 감정이 있을리 없고, 또 자신의 왕국이나 영역의 경제력 및 군사력이 황제의 중앙정부보다 커지게 되면 상황이 많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의 주나라 말엽에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지 않았던가?
우리나라는 땅이 좁아서 중국처럼 각 지방의 왕으로 봉하는 봉건제도가 운영된 적은 없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것이 식읍 또는 녹읍제도라고 할 수있다. 식읍제도는 고대 중세국가에서 주변소국의 피정복지역을 공로자에게 주고 대대로 세습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녹읍은 관리들에게 주는 것이므로 원칙적으로 자식들에게 세습할 수 없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그래서 식읍은 중세 유럽의 영주와 비슷하다. 해당 지역의 조세와 공납과 노역을 다 받을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이니 그 지역의 왕이나 다름없다.
귀족들, 관료들에게 댓가를 어떻게 지불하였는가는 토지 및 급여제도 변천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제도의 변화를 보면 중앙집권 왕권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우리나라 역사가 발전하였음을 알 수있다.
3. 용어를 이해하자
- 조세 : 토지에 부과하는 것, 농사를 짓는 땅이면 그 땅에서 나오는 수확량의 일정량을 세금으로 납부
- 공납 : 사람에게 부과하는 것, 사람마다 일정한 액수의 돈 또는 물건(곡식, 특산물 등)을 납부
- 역(노역) : 백성들을 동원해서 일을 시키는 것, 군인. 식읍안의 백성을 동원하여 군대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위험요인.
- 식읍 : 귀족(왕족, 공신)들에게 주어진 수조권과 노동력(요역) 징발권, 세습가능. 지역 세력가에게 충성의 댓가로, 군에서 공을 세운 댓가로 지급
- 녹읍 : 관료 귀족들에게 주어진 일종의 급여(월급 등), 수조권과 노동력 징발권, 세습불가
- 관료전 : 귀족들에게 수조권만을 부여, 세습
- 노동력(요역) 징발권 : 자신에게 주어진 땅을 경작하는 백성들을 농사일 말고도 기타 용도(노역, 군역 등)에 활용할 수있는 권리
- 수조권 : 세금을 받을 수 있는 권리
- 왕토사상(王土思想) : 백성과 나라는 모두 왕의 소유('주인이 왕'이라는 뜻)라는 전제군주체제의 기본틀
- 전시과 : 고려시대 토지관리 시스템중 하나. 군사적 목적. 전시관이 주관하여 토지를 조사하고 관리함. 관직을 수행하는 댓가로서 지급된 것이므로 수조권만 줌. 소유권은 국가가 갖음. 세습불허. 전지 (田, 농토) 와 시지(柴地, 땔감을 얻는 山地)를 지급하는 체계
- 역분전 : 고려 건국과정, 후삼국 통일과정에서 공이 있는 신하나 군사들에게 지급한 토지. 세습가능
- 과전법 : 수조권이 설정된 토지를 전직과 현직관료에게 지급. 원칙적으로 세습불가
- 직전법 : 수조권이 석정된 토지를 현직관료에게만 지급(전직관료에게는 지급 않함)
- 공음전 : 문벌귀족들의 특권, 5급이상 관리에게만 지급. 세습가능
4. 제도의 변천
- 신라 신문왕 7년(서기 687), 9년(서기 689) : 녹읍을 폐지하고, 문무(文武) 관료들에게 토지를 차등을 두어 관료전을 지급. 왕권이 강화됨
- 신라 성덕왕 21년(서기 722) :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정전(丁田)을 지급, 기존 농민 경작권을 인정하여 정전지급. 농민지배력 강화 및 왕권 강화
- 경덕왕 16년(시기 757) : 진골귀족의 반발에 대응.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리에게 매달 주던 녹봉(祿俸)을 없애고 다시 녹읍을 부활 및 관료전 폐지, 왕권 약화
- 고려 태조 : 역분전, 후삼국통일과 고려건국에 공이 있는 신하와 군사들에게 지급, 사람의 인품과 행실이 착하고 악하고 또는 공이 크고 작음을 고려하여 토지지급
- 고려 경종 : 시정전시과, 인품과 18관품에 따라 문무 전직 및 현직관리에게 지급함. 처음 시행한 전시과
- 고려 목종 : 개정전시과, 18관품에 따라 문무 전직 및 현직관리에게 지급. 인품요소는 배제, 전시과를 개정한 것 <ㅡ 인품을 어떻게 평가?
- 고려 문종 : 경정전시과, 18관품에 따라 문무 현직관리에게 지급. 전직관리는 제외, 개정전시과를 다시 고친(갱정) 것 <ㅡ 땅이 부족함
신라 신문왕이전에는 식읍 및 녹읍제도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다보니 지방호족세력이 강하고 축적된 경제력 및 군사력으로 중앙정부를 압박하는 일이 많았다. 삼국통일후 이러한 폐단을 바로 잡기위해서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한 것이다. 성덕왕때는 일반 백성들에게도 일정한 크기의 전답을 나눠줬는데 이것을 정전이하고 한다. 이와 같은 정책은 중앙정부의 힘이 강하고 왕권이 확립되어 있을 때 가능한 것인데, 신라 하반기로 갈 수록 왕권이 약화되어 결국 경덕왕때에 녹읍이 부활되고 말았다. 이 정책에 따라 지방호족들의 세력이 팽창하게 되고 결국은 그 지방호족세력들에 의해 신라가 무너지고 후삼국을 거쳐 고려가 건국되는 것이다. 고려태조 왕건도 황해도 송악지역의 호족세력출신이지 않는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관리들 급여를 어떻게 줄 것인가?'가 큰 숙제였고 모순점을 하나씩 개선할 때마다 제도가 바뀌었다. '역분전'에서 '시정전시과', '개정전시과', '갱정전시과'로 바뀌었다. 결국 문종때 현직관리에게만 지급하고 그 보직을 그만두면 국가에 반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전직관료, 귀족들이 가만 있었을까? '보직 떨어지면 굶어 죽으란 말이냐?' 하면서 온갖 불법이 다 생겨나게 되었다. 고려 후반기의 몽고, 홍건적 침입 등 외침기시에 권문세족들의 가렴주구는 결국 고려멸망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고려 최후의 왕인 공양양때 과전법을 시행한다. 권문세족들이 불법으로 차지한 토지를 몰수하여 당시의 신진 사대부들에게 지급한 것인데, 이는 이성계 등 조선건국세력들에게 경제적 기반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기도만을 대상으로 한 제한적 시행에 불과했다.
조선건국이후 세조대 직전법을 실시하여 현직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주었고, 성종때가 되어서야 직전법을 폐지하고 녹봉제를 실시하였다. 비로소 우리역사에서 수조권을 국가가 직접관리하고 급여는 국가가 직접 지급하는 체제가 확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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