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분류 전체보기40 장준하 공원, 독립과 민주화 투사의 허망한 최후 1. 장준하 공원과 묘지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성동리에 가면 '장준하 공원'이 있다. 오두산 통일전망대에서 가까운 곳이라서 그 곳을 관광하고 잠시 들르기 좋은 곳에 위치해 있다. 공원이라고 해도 그리 넓지는 않은 소공원이다. 잔디밭이 아담하게 조성되어 있고 조형물에는 장준하 선생의 일대기가 기록되어 있다. 조형물 뒷 쪽 산길을 조금 올라가면 장준하 선생 묘소가 있다. 묘소는 조그마한 돌로 만들어져 있고 묘소 주위에는 기념물들이 서있는데 여기에는 장준하 선생이 쓴 글들이 새겨져 있다. 특히, 사상계라는 잡지에 기고하신 글이 선생의 필적으로 새겨져 있는 기념물이 있어서 읽어보니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자손만대에 누를 끼치는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지성일관 용왕매진하자'라고 .. 2023. 10. 15. 화청지에서 양귀비의 사랑에 망가지는 나라와 장한가 1. 화청지, 양귀비와 당현종의 로멘스 중국 산서성 서안에서 동쪽으로 30여km 떨어져 있는 여산아래에는 화청지라는 유명한 관광지가 있다. 이곳은 고대 중국왕조인 주나라 시절부터 온천이 유명하였는데, 당나라시절에는 화청궁이라는 궁전이 있었다. 이 곳은 당나라 황제였던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이야기로 유명한 곳이다. 위 사진의 조각상은 막 온천욕을 마치고 나온 양귀비의 모습이다. 화청궁은 '안록산의 난'으로 대부분 불타 없어진 것을 청나라, 중국정부에서 약 30%만 복원하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 넓이와 화려함이 대단하니 원래 모습의 화려함은 어쨌을까 상상하기 어렵다. 서안은 당나라 시절에 장안이라고 불리었다. 장안은 유방이 세운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의 수도였다.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나라 수도 함양도.. 2023. 10. 14. 판전 서예, 추사 김정희 선생 최후의 걸작이다 1. 봉은사 판전 편액 서예작품 감상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가면 코엑스 맞은편에 봉은사가 있다. 봉은사는 서기 794년(신라 원성왕)에 '견성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된 사찰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성종의 무덤인 선능을 관리하는 능침사찰이 되면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와서 토지를 많이 하사받았기 때문에 은혜를 받든다는 의미의 '봉은사'로 절 이름을 고친 것이다. 조선 명종시절 문정왕후때는 승려들의 과거시험격인 승과시험을 치른 장소이기도 했다. 이러한 까닭에 현재 강남 한 복판 요지에 넓은 땅을 차지하고서 봉은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요란한 강남에 있지만 사찰 경내에 들어가면 엄숙하고 고요하다. 이처럼 도심 한 복판에 등산없이 접근가능하면서도 숲으로 어우러진 큰 사찰은 봉은사가 유일하다. 봉은사 대웅전과 판전.. 2023. 10. 14. 불국사, 현세와 내세로 가는 부처님 나라의 형상 1. 불국사는 누가 언제 지었나? 경주시 토함산 서쪽 기슭에는 유서깊은 사찰 불국사가 자리하고 있다. 불국사 창건은 2가지 다른 주장이 존재한다. 먼저, 서기 528년(법흥왕 15년)에 법흥왕의 모친 영제부인의 발원으로 창건되었으며 574년에 진흥왕의 모친 지소부인이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을 주조하여 봉안하였고 통일신라시대인 서기 751년(경덕왕 10년)에 당시 재상인 김대성이 크게 중수하여 탑과 돌다리 등을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두번째, 우리나라의 정사 역사책인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한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김대성은 원래 모량리의 가난한 집에 태어났으나, 인연에 따라 경주시내 부자이면서 권세가인 김문양의 집에 다시 태어났고, 이 사실이 김대성이 부자집에 다시 태어난 날 하늘에서 들렸.. 2023. 10. 13. 다산초당, 천주교로 고초당한 정약용의 유배지 1. 다산초당은 정약용의 유배지다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 기슭에는 다산 정약용이 유배생활을 하던 다산초당이 있다. 초당이라면 초가집을 말하는 것인데 현재시설들은 모두 기와집으로 되어있다. 이는 선생님 사후에 복원하면서 당시와 다르게 기와집으로 복원한 때문이다. 아마, 초가집은 내구성이 부족하여서 관리하기 힘들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당시모습 그대로 복원 보존하지 않은 것이 좀 아쉬웠다. 다산은 강진의 귤동에 있는 산 이름이다. 이 기슭에서 오랬동안 유배생활을 하셨으므로 정약용 선생이 자신의 호로 삼은 것이다. 당시 선비들은 이름을 부르기 보다 호를 불렀다. 이름은 부모님으로 부터 받은 소중한 것이라 함부로 부를 수 없고 호는 허물없이 부를 수 있도록 정한 호칭인 것이다. 이 유적지에는 다산초.. 2023. 10. 13. 덕진산성, 인조반정으로 노론주도 역사 출발지 1. 덕진산성은 전략적 요충지였다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어져 있는 현재의 상황에서 휴전선 부근에서 남쪽 땅을 바라볼 기회는 많지 않고 그러한 장소도 별로 없다. 그런데 덕진산성을 그것이 가능한 곳 중의 하나이다.더우기 민통선 안에 위치해 있어서 보통 사람들 접근이 수월하지 않은 관계로 자연 풍광이 잘 보존되어 있고 인적이 별로 없어 조용하며 현대적 시설물이 별로 없어 아주 편안하고 포근한 느낌을 주는 장소이다. 덕진산성은 민통선 안인 파주군 군내면에 위치해 있다. 이성은 연천의 은대리성, 호로고루성, 당초성과 함께 3국시대에 고구려가 쌓은 성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 미루어 이 지역은 신라, 백제, 고구려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다툰 지역일 것이다. 한국역사에서 한강을 중심으로한 중부지역을 차지하는 .. 2023. 10. 12. 북관대첩비, 임진왜란 때 맹활약한 의병장 승전기 1. 임진왜란은 동북아시아 국제 전쟁 1592년(선조 25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우리나라에 침공해온 일본과의 7년전쟁이 임진왜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전쟁시작년도와 침략주체를 나타내기 위해 '壬辰倭亂'이라 부르지만 일본에서는 '분로쿠-게이조의 역(文錄-慶長의 役)', 중국에서는 '만력의 역(萬曆의 役)'이라 불린다. 文錄-慶長은 일본, 萬曆은 중국의 당시 연호(年號, 동양 군주국가에서 자신이 다스리는 기간을 부르는 명칭, 즉 군주 자신만의 달력)였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당시 조선)는 쇄약해질대로 쇄약해져 있었다. 정치적으로 연산군 이후 훈구파와 사림파의 싸움인 사화(士禍)가 계속되었고, 동서(東人, 西人)로 나눈 붕당의 당파싸움은 국정을 극도의 혼란에 빠뜨리고 있었다. 군사적으로도 조선초.. 2023. 10. 12. 수성화성, 성곽 축성과 좌절된 정조의 개혁 1. 조선 성곽은 일본이나 유럽과 다르다 동양에서 말하는 성과 외국에서 말하는 성은 개념이 좀 다르다. 성이 공격을 받을 때 방어기능을 하는 것은 기본적 기능이지만, 한양도성은 도시를 둘러싸고 한양과 그 나머지 지역을 구분하는 경계 역할을 주로 한다. 반면에 서양이나 일본의 성은 성주나 영주가 거처하는 호화로운 저택으로서 침략시 방어에 유리하도록 지리적으로 높은 지역에 건설하거나 성 주변에 해자를 둬서 방어적 역할을 할 뿐이지 경계로서의 역할은 없다. 대표적으로 일본의 오오사카의 히메지성이나 독일의 노인슈반스타인성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성을 외부침략에 대한 방어시설 측면에서 보면, 조선의 성곽은 성안의 모든 백성들과 함께 살자는 것이고, 서양의 성은 평소에는 권위를 상징하고 전시에는 성주나 영주의 안위.. 2023. 10. 12. 경복궁, 조선건축에 반영된 성리학 및 풍수지리 1. 조선 건축이해는 기본지식에서 출발 지금부터 약 600년 전에 건국된 조선( 1392년부터 1910년까지 518년 동안 존속)의 건국과정은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부분에서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조선이 한양을 수도로 삼았기 때문에 지금의 서울이 있고, 조선의 궁궐과 한양도성등 각종 건축물들이 도시공간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를 개창한 사람은 고려말기의 명장 이성계이다. 그는 함경도 함흥의 지방 군벌이지만 중국으로부터의 홍건적, 남쪽의 왜구침입을 성공적으로 방어함으로써 신망을 얻었는데 세력을 키워 결국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것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건국 주체세력은 고려말 신진 사대부들이다. 이들은 고려 중기부터 송나라부터 유입된 주자의 성리학으.. 2023. 10. 12. 용주사, 융능 조성으로 부모은중경 모범 보인 정조 1. 용주사는 융능 능침사찰이다 용주사는 수원화성에 위치한 융능과 건능(사도세자와 정조의 능) 능침관리사찰로서 조선 22대 정조의 명으로 중창되었다. 이곳에는 신라시대때부터 갈양사라는 절이 있었으나 병자호란때 소실되어 없어졌었는데, 정조가 자기 아버지 능을 현 위치로 옮긴 후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위해 건립한 것이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 능은 양주 배봉산(현재 서울 전농동)에 있었으나 왕이 된 후 천하 명당이라는 수원 화산으로 이장한 것이다. 교조화된 골수 성리학이 맹위를 한참 떨치던 조선왕조라서 아무리 국왕이라도 정조가 불교 사찰을 건설한다고 했을 때는 당시 유학자들과 신하들의 반대가 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정조는 효를 실천하기 위한 것이라는 명분을 내걸었을 것이다. 아마도 유교에서는 효행.. 2023. 10. 12. 이전 1 2 3 4 다음 반응형